[기고]2018년 12월의 한국 ? 다시 사람을 생각한다
‘50년 외길 건설엔지니어’ 이순병의 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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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병 한국공학한림원 원로회원 |
자연현상에 대한 약속과 달리 ‘사람다운 삶’이나 ‘함께 잘 사는 세상’이라는 주제는 약속을 만들어 내기가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사람’과 ‘사람다운 삶’의 정의(定義)에 대하여 모두가 동의해야 ‘왜 함께 잘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성(當爲性)을 찾을 수 있고, ‘그럼 이렇게 살자’라는 약속이 나올텐데 안타깝게 아직도 정의 단계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지만 TV에서 이웃을 돕는 착한 사람이나 어려움을 극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휴먼(human) 드라마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거기에 답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다운’이라고 이해되는 휴먼이라는 단어는 신(神 divine)에 대응되는 의미로서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동양에서 사람은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이’ 사는 도덕적 존재이지만, 서양에서 사람은 신과 주종(主從 Lord and servant)관계로 인식되었습니다. 신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 논쟁이 시작된 것은 300년 전 과학의 발달과 궤를 같이 합니다.
그리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과학 시대 이전에도 사람 간(between people and people)의 수직적 관계는 있었습니다. 과학의 발달은 사람을 육체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시작했고 자본이 형성되면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구분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이 사회적 동물인 이상 왕과 백성, 귀족과 평민, 양반과 상놈, 유산계급과 무산계급,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권력과 부(富)의 대립적 관계는 계속되어 왔고, 불행하게도 과학기술이 발전할수록 대립의 거리는 점점 멀어져가고 있습니다.
금년 5월 베이징에서는 칼 막스 탄생 200주년 행사를 성대하게 거행했습니다. 중국이 마르크스주의의 계승자로서 헌법에 명기한 시진핑 사상의 기반을 다지기 위한 목적이라 합니다. 트럼프의 백악관에서 10월에 발간한 ‘사회주의의 기회비용’이라는 보고서는 “칼막스 탄생 200주년에 맞추어사회주의가 미국의 정치적 담론으로 다시 돌아오고 있다”로 시작됩니다.
한편 금년 중국에선 행동하는 지성들의 큰 울림이 있었습니다. 길림대 리샤오(李曉) 교수는 졸업하는 제자들에게 ‘관용, 독립적 사고, 스스로 선택’을 당부하였고, 북경대 장웨이잉(張維迎) 교수는 중국모델(일당독재, 국영기업)이 아닌 보편적 모델(시장, 기업가정신, 과학기술)이 맞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장교수의 강연내용은 삭제되었다고 하는데, 시진핑의 개인권력화와 무관해 보이지 않습니다.
장웨이잉이 주장하는 보편적 모델은 미국모델입니다. 영어가 영국 말이 아니듯 미국모델이 미국만의 것이 아닙니다. 미국은 이민의 나라입니다. 부르주아의 수탈도 가혹했지만 프롤레타리아 독재도 많은 사람들을 미국으로 가게 만들었습니다. 지금 트럼프의 반이민정책이 비난 받는 것은 고국을 등진 사람들끼리 사람답게 살자는 약속으로 만든 체제가 미국모델이기 때문입니다.
계획경제에서도 스마트폰을 만들 수 있겠지만 20만원으로는 절대로 못 만듭니다. 가난한 나라의 젊은이들도 부자나라 젊은이와 똑같은 정보의 혜택을 누리게 된 것은 시장의 힘입니다. 어느 체제를 선택한 사람들이 더 많은 가치를 함께 누리고 사는지 우리는 매일 보고 있습니다. 전체주의의 절대빈곤 속에 사는 사람들의 눈에는 ‘금수저, 흙수저’ 같은 말 장난으로 시장경제의 상대빈곤을 논하는 것이 참으로 사치스럽게 느껴질 겁니다.
“’천국도, 지옥도, 종교도 없다. 나라라는 것도 없으니 누군가를 죽여야 할 일도, 무엇인가를 위해 죽어야 할 일도 없다. 욕심도 없고 배고픔도 없는 세상을 함께 나누며 산다’ 당신은 내가 꿈을 꾸고 있다고 할 지 모르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나 혼자만이 아니에요. 언젠가는 당신도 이리로 올 거에요. 그러면 세상은 하나가 되겠지요.” 비틀즈의 존 레논이 부른 이 노래의 제목은 ‘이메진(Imagine)’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그런 세상은 없다는 것이죠.
미국 국가정보위원회(NIC)가 2016년 말 펴낸 ‘글로벌 트렌드 2035’의 부제목은 ‘진보의 역설’입니다. 함께 잘 살려 할수록 불평등이 심화되는 역설적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데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사람들의 현명한 선택에 달렸다고 썼습니다. 그 전 해에 ‘호모 데우스’라는 책을 펴낸 세계적 담론가 유발 하라리도 사람이 신에 가까이 갈수록 땅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들과 멀어지게 될 것이고 현명한 선택만이 이 세상을 구할 것이라고 결론을 짓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물질적 풍요는 지구 어디에선가 하루 1달러도 못 받고 일하는 사람들의 피땀으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이 나라에서 정의와 진실을 주장하면서 자식들은 미국으로 보내는 지식인들은 이 가난한 사람들과도 더불어 살자고 해야 합니다. 우리는 착한 대통령을 선택했지만 먹고 사는 문제에서는 중국, 인도, 베트남 노동자들과 시장에서 싸워야 합니다.
1999년 한국인의 우월성과 감성 등에 대한 책을 써서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마이클 브린은 35년 넘도록 한국에 살면서 주한외신기자클럽회장도 했던 사람입니다. 2017년 초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예상했던 이 기자는 한국인들은 현명해서 이 법치주의의 위기를 빨리 벗어날 것이라는 말로 우리의 아픔을 위로했습니다.
선(禪)불교의 화두(話頭)는 정해진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실체를 보기 위한 수행법입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화두는 두 번의 반전을 겪는다고 합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가 첫 단계이고,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가 두 번째 단계입니다. 그리고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가 마지막 단계가 됩니다. 내공이 깊은 종교인들의 눈이 어린아이 것처럼 보이는 것도 그런 수행의 결과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두 번째 단계에 들어와 있는데, 그 타고난 현명함으로 곧 성숙한 나라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빨리 경제 발전에 성공한 사례로 많은 나라들의 교범이 되었던 한국은 지금 이념 투쟁의 한가운데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로 다시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몇 사람의 머리로 ‘모두 함께 잘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많은 나라들이 ‘우리는 잘 살고 있다’고 사람들을 세뇌해야 유지할 수 있는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다 같이 행복한 나라가 아니라 행복하다고 말해야 목숨을 이어갈 수 있는 나라들이 우리와 멀리 있지 않아서 가슴이 아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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