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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달샘 이야기/변 영 희

능엄주 2018. 9. 8. 08:18



옹달샘 이야기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방송이 흘러나왔다. 평소의 여직원 음성이 아니다. 관리소장의 목소리인가. 목소리에 연륜이 느껴졌다. 탁음이었고 발음이 선명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다시 한 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하고 그 탁음의 선명하지 못한 내용이 조용한 시간에 반복되는 것에 대해서 나는 별로 반갑지 않았다.

여러 가구가 모여 사는 대단지 아파트는 때때로 주민들에게 알려야 할 사항이 많은 모양이다. 지하차고 대청소라든지, 고장 난 급수관 부속품을 수선하다든지, 동별 소독하는 날이라든지 등등, 이유는 여러 종류였다.


오늘은 아침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냉 온수 단수에 관한 건이었다. 지겹던 무더위가 물러가고 두어 차례 태풍이 지나가고 나서 제법 서늘한 갈바람이 불어오자마자 단수 소식이라니 좀 성가신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무더위 때문에 미뤄둔 일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늦잠을 잔 나는 잠시 당황했다. 7시 33분이었다. 늦잠은 어제 밤 명동의 프린스 호텔 ‘소설가의 밤’에 참석하고 늦게 귀가한 탓이었다. 나는 얼른 이부자리를 접지 못하고 자리에서 뭉갰다.


초가을의 눈부신 햇살이 베란다와 방안에 기세 좋게 펼쳐져 있었다. 전에는 잘 몰랐더니 올 가을은 유난히 눈부신 햇살이 소중했다. 밝고 빛나는 아침 햇살을 바라보면서 곧 단수가 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게으르게 마냥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당장 샤워를 한다고 해도 단수가 시작되는 8시까지 끝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나는 무작정 욕조에 물을 받기로 결정했다.


“엄마! 물 별로 쓸 일도 없는데 조금만 받지.”

콸콸 떨어져 내리는 물소리에 딸이 다가왔다.

“그래도 물은 좀 받아놔야 해. 나는 물이 없으면 괜히 불편해.”

욕조를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나는 그릇 그릇에 물을 받아 놓고 외출했다.


깊은 밤 집에 돌아오니 욕조를 가득 채운 물이 대견했다. 또 한 편 이 많은 물을 다 어디다 사용하지? 저녁밥을 지을 것도 아니고, 무슨 세탁물이 쌓여 있는 것도 아니었다. 걱정이 슬그머니 머리를 쳐들었다.

그런데 찰랑거릴 만큼 가득 채운 물이 얼마나 시원하냐. 얼마나 뿌듯하냐. 푸르스름한 물빛이 하얀 색의 욕조와 어울려 보기에 흡족했다. 나는 외출복을 벗지 않은 채 플래스틱 바가지로 물을 퐁! 떠 보았다. 마신 것도, 손을 씻은 것도 아니지만 갑자기 바다물이, 강물이, 시냇물이 내 발을 적신 것처럼 기분이 상쾌했다. 집안에 옹달샘을 소유한 듯 마음이 풍성해졌다.


자연스럽게 멀고 먼 기억 여행을 떠났다. 중 1때였다. 큰언니가 몸이 안 좋아서 C 시의 번화가에 있는 집을 떠나 명암방죽으로 가는 산 중턱의 고지대로 이사를 갔다. 뒤꼍에 꽤 둥치가 큰 아카시아 나무가 있고 앞마당에는 소나무 동산과 화단이 있는 아담하고 그림 같은 집이었다. 성가신 것은 담장 너머에 산이 있어 집 마당으로 가끔 뱀들이 출몰하여 우리 형제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장독대 주위에는 부추와 딸기나무가 자생하여 나는 처음으로 딸기 꽃과 부추 꽃을 볼 수 있었다. 특이한 것은 장독대에서 옆으로 20M 쯤 떨어진 곳에 옹달샘이 있었다. 맑은 샘물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졸졸 흘렀다. 아무리 퍼 써도 샘물은 줄지 않았고 흐려지지도 않았다.


어머니는 언년이와 함께 명암방죽에 가서 예쁜 돌을 이고 지고 날라 와 옹달샘 가장자리를 동그랗게 꾸몄다. 오라비들은 산에서 주어온 깡통 같이 기다랗게 생긴 관을 박아 물길을 잡아 놓았다. 그 위에 손수건 정도를 비벼 빨 수 있도록 빨랫돌까지 심어 놓으니 옹달샘 풍경은 대체로 구색을 갖추게 되었다. 가을이 되면 노랗게 물든 아카시아 잎이 옹달샘에 떨어져 샘물을 운치 있게 수놓았다.


우리 형제들은 옹달샘을 싫어하지 않았다. 싫어하기는커녕 그 반대였다. 이른 아침 잠에서 깨어나기 무섭게 뒤꼍의 옹달샘으로 몰려갔다. 흐르는 물에 세수를 먼저 하려고 덤벼들다가 서로 몸을 부딪치면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곤 했다. 명랑한 웃음소리가 늘 집안에 가득 찼다.

식수는 아니지만 옹달샘은 가족들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주었음이 틀림없다. 몸이 아픈 큰언니도 자주 옹달샘으로 나왔다.지금 이 순간 손수건, 양발 등속을 펼쳐들고 옹달샘 물을 퐁퐁 퍼 올리던 형제들의 손길이 보이는 것 같다. 샘가에 모여앉아 학교 갈 시간도 잊고 재잘거리던 일이 아득한 추억이 되었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의 단수 조치로  수돗물을 욕조 가득 받아놓고 나는 꿈속을 헤매듯 과거로의 여행을 시도한다. 욕조의 물을 다시 플래스틱 바가지로 퐁 떠 본다.물 푸는 소리가 싱그럽다. 마치 옹달샘에 모여 앉은 형제들의 웃음소리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