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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을 읽으며

능엄주 2013. 9. 1. 22:13

최명희 혼불 10권을 집에 모셔놓은지 꽤 오래 되었다.
먼저 읽은 사람들이 '굉장해! 꼭 읽어야 해. 한국의 전통문화, 역사, 복식과 예절, 기제사 모시는 법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이 수승한 내용이 다 실렸다' 라고 하는 찬사와 감동어린 권유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10권의 혼불이 매양 버겁게 여겨졌다.
바쁘다는 핑계였다.

 내 시간과 신경을 다른 일이 계속 빼앗아갔고, 언제 한가하게 들앉아 그 책을 펼쳐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꾸준히 우편으로 보내오는 문학동지들의 글을 읽는 일만으로도 하루 스물네시간이 늘 모자랄 지경이었다. 고생고생하면서 저작한 책을 정성껏 보내주면 우선 혼불보다 먼저 읽지 않을 수 없었다.그게 문학동지들에 대한 나의 애정이고 관심의 표현인 양 나는 우선순위를 두었다.

사계절이 후딱 지나 해가 바뀌고 온 세상이 폭설에 묻혀 오랫동안 밖에 나갈 수 없게 되자 나는 그 책을 서가에서 빼들었다. 한 권 읽고 두 권 읽고, 한 권씩 차례대로 읽으면서 나는 그만 숨이 가빠 짬짬히 쉬기도 하고, 독서일기 노트를 펼치고 중요한 대목을 필기하면서 혼불 속에 빠져들어갔다.

감탄 감격 감동에 이어 나는 섬뜩할 정도로 최명희 작가에게 모종의 두려움마저 품으면서 줄기차게 읽어나갔다. 이건 사람이 쓴 게 아니야! 어쩜 이렇게 표현할 수가 있어? 그 표현이라는 단어가 좀체로 성에 차지는 않았지만 최명희의 언어는 이미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천상의 것, 사차원 오차원의 세계에 존재하는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신묘한 것으로 내 영혼 속에 각인되고 있었다.

나는 책읽기를 중단하고 방밖으로 나왔다. 내 머리와  내 가슴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얼마 전에도 읽고 싶은 글 혹은 남에게 권하고 싶은 소설 이라는 제목이 붙은 단편소설을 읽으며 심장의 박동이 위험 상황에 처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더니 혼불은 나에게 거의 공포였다. 한 사람의 여성 작가의 위상이 우뚝 돋보인다고 한다면 그건 이야기 거리도 안된다. 실로 위대하고 장하다고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며칠 벌렁거리는 가슴을 진정하고나서 나는 차분하게 혼불의 독후감을 정리해야 할 것 같다. 계사년 신춘에 이르러 나의 행적은 최명희의 <혼불>과 더불어 힘찬 발걸음을 떼어 놓는다.
나에게 2013년의 출발에 용기가 되고 희망의 불빛으로 다가온 혼불!  혼불 10권을 쓰고 아쉽게도 유명을 달리한 최명희 작가에게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