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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는 ‘제2의 민주화 운동’/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능엄주 2018. 3. 10. 21:36

뉴스 ZUM[시론] 미투는 ‘제2의 민주화 운동’ - (입력 2018.03.10 01:22 )                              

구조적 차별·배제의 결과이기에

주요한 정치적 의제로 다뤄져야

미투는 성차별 개혁의 시민혁명


참담한 심정입니다. 자유와 인권을 옹호하던 한 도지사의 성폭력 사건이 많은 시민을 자괴감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통상 가해자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일성인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는 인식은 무너졌습니다. 그럴만한 ‘환자’나 ‘악마’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가부장적 남성 중심 사회에서 자란 많은 남성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음모론과 진영논리에 빠져 피해자를 의심하며 평소의 행실을 따져 묻고, 성폭력 피해를 포르노그래피적으로 소비합니다. 남의 집 불구경하듯 정쟁에 활용하기 바쁩니다. 문제를 제기하고 공론화하며 사안의 본질인 성별 권력관계와 성차별적 구조를 이야기하는 여성들을 ‘페미나치’(‘페미니스트 나치’의 줄임말)로 낙인찍기도 합니다. 여자를 분리하고 배제하면 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시 문제는 여성에게 전가됩니다.

하지만 성폭력은 여성문제가 아닙니다. 불같이 일어나고 있는 ‘미투 운동’은 수직적 위계문화 속에서 타인을 통제하고 지배하고 제압하고 군림해야만 남자답다고 여기는 사고방식, 폭력적 남성성을 획득하고 실행하던 남성들에 대한 문제제기입니다. 성차별적 구조를 만들고 재생산해 온 남성들의 문제입니다. 시대가 바뀌고 시민의식이 성장했음에도 여전히 가부장적 인식에 사로잡혀 여성을 동등한 시민이나 동료로 보지 않았던, 그래서 같은 일을 하면서도 여전히 여성은 성적 매력을 풍기며 남성의 요구에 순종적으로 응해야 한다고 여기며, 배제하고 비하하고 희롱하고 무시하고 때리고 성폭력을 행사했던 그런 남성들의 문제입니다.

8일 ‘여성의 날’ 기념행사가 지구촌 곳곳에서 열렸습니다. 여성들은 이미 오랫동안 여성 억압 구조와 차별적 행위에 문제제기하고 저항하며 변혁에 목숨을 걸어 왔습니다. 법과 제도가 어느 정도 여성의 인권을 보장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시대이지만 지속되는 성차별과 성폭력 문화에 여성들은 분노했고 다시 거대한 여성운동의 물결을 일으켰습니다.

중앙일보


런 면에서 한국의 ‘미투 운동’은 서구 여성운동의 ‘제2의 물결’을 떠올리게 합니다. 당시 진보적 학생운동·시민운동 영역에 있던 여성들은 남성혁명가들이 지향하던 민주·평등·해방이라는 가치를 여성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해 달라고 호소하지만 거부당합니다. 일상 속에서 개인이 겪는 사적인 문제가 거대한 구조에서 기인한다는 신좌파의 구호가 여성에는 적용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특히 여성들은 진보 남성들이 말하던 ‘성 혁명’이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를 해소하기는커녕 더 취약한 상황으로 내모는 상황에 분노합니다. 여성을 남성의 성적 욕망을 배출하는 ‘쓰레기통’으로 취급하면서, 공적 영역에서는 여전히 여성을 보조적인 존재로 비하하고 배제하는 태도에 격분한 것입니다. 여성들은 분연히 일어나 ‘여성문제’라 치부되던 사안들을 본격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합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구호는 당시 페미니스트들의 핵심 구호가 됩니다. 개별적 문제가 결코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결과 때문이 아니며, 여성들의 고통은 사소한 게 아니라 구조적 차별의 결과이기에 주요한 정치적 의제로 다뤄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해방의 주체와 대상 모두에 여성이 빠져 있다는 인식, 그리고 민주주의·평등·인권이라는 가치에서 여성은 배제되어 있다는 인식이 여성들을 페미니스트로 각성시킨 것입니다. 단순히 기계적 ‘양성평등’이나 형식적 권리 보장을 위한 법제도 개선이 아니라 뿌리 깊은 성차별 문화를 해체하고자 전 방위적 혁명을 요구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진보 운동권 내 성차별과 성폭력 문화가 서구 역사상, 아니 전 세계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거대한 페미니스트 운동의 물결을 만들어낸 것이지요.

지금 미투 운동을 ‘미투 혁명’이라 부르는 이유입니다. 한 세기 이상 진행된 한국 여성해방 운동의 역사에서 가장 커다란 해일이 될 것입니다. 성 평등이 결핍된 민주주의를 이제야 완성하고자 하기에 ‘제2의 민주화 운동’이며, 일상 속 성차별 문화를 개혁하고자 아래로부터 분연히 일어난 ‘시민 혁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별, 계층, 인종, 나이, 학벌, 성적 정체성, 장애 유무 등과 무관하게 상호 존중하고 돌보는 세상을 만들어야 할 절체절명의 시기가 도래했습니다. 봉건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케케묵은 남성성의 옷을 벗지 못하면 기껏 이뤄낸 민주사회마저 퇴행하게 됩니다. 한국사회를 퇴행시킬 역풍의 장본인이 될지, 아니면 보다 나은 민주사회를 위한 디딤돌이 될지 우리 모두 결정할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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