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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쇠물/변영희

능엄주 2018. 2. 22. 23:30

고로쇠물


언제였던가. 아마도 30여 년 전일 것이다.

장편소설 3부작 [마흔넷의 반란] 을 발표하고 나서 한동안 심신이 지칠대로 지쳐 마음 못 잡고 헤맬 때 였다고 기억한다.

동창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글 쓴다는 애가 밤낮 한 자리에 있어 무슨 좋은 생각이 떠오르겠니? 당장 나와라!"

어디를 간다는 말도 없이 무작정 당장 나오라는, 다소 황당한 전화였다.

 나는 반가웠다. 친구 만난지도 오래됐고 무작정 어딘가로 떠나고 싶었던지 모른다.

우리는 대전에서 만나 남쪽으로 달려갔다.


"어디 가는데?"

한 마디 쯤 물어봐도 좋은데 나는 친구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친구 역시 어디를 왜 가는지 행선지나 그 이유를 말하지 않은 채 그냥 달렸다.

연도에 핀 들꽃을 바라보며 우리는 흥얼흥얼 가을이란 계절에 걸맞는 노래를 골라 신나게 부르기 시작했다.

기분이 점차 상승하면서 배고픈 줄도 모르고, 지루하지도 않게 전주, 구례, 화개를 지나갔다. 내처 쌍계사를 지나 범왕리 골짜기로 올라갔다.

해저문 저녁시간에 칠불사에 도착했다. 나로서는 처음 오는 절이었으나 친구는 수 차례 다녀갔고 더러는 며칠 씩 머물기도 하여

주지스님을 비롯, 절 식구들을 두루 잘 알고 있었다. 곧바로 주지스님이신 통광스님 방으로 안내되어갔다.

친구를 따라서 나는 주지스님께 큰 절을 올리고 자리에 앉았다. 스님께서는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시고  손수 차를 닳여 주셨다.

우리는 새벽예불, 사시 기도, 저녁 기도에 열심히 동참했다. 갑자기 안하던 절을  한꺼번에 하고 나니 무릎이 삐그덕거렸지만 모처럼 초발심을 회복한듯 환희심이 솟아났다.


그 다음 해 이른 봄 친구와 함께 다시 칠불사에 갔다.

정월 대보름이 며칠 남았던가. 산등성이에 흰눈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요사채 온돌은 뜨겁게 달구어져 새벽 예불 드린 후 들어오면 고향집처럼 마음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그처럼 따끈한 온돌방은 참으로 오랜만이었고 군불 지펴주는 처사님께 깊은 감사가 저절로 울어나왔다.


주지 스님 방도 뜨끈하기는 여전했다. 노랗게 익은 장판방에서 우리는 통광스님이 따뤄주시는 고로쇠물을 마셨다.

"많이 마셔도 탈이 없어! 자! 더 드시라!"

한 대접 두 대접, 우리는 스님의 고로쇠 대접을 사양하지 않고 주는대로 받아 마셨다. 달콤하고 시원한 그 맛!

초등학교 시절 소풍길에 담임선생님이 퍼 주시던 두레박 물맛일까? 어쩌면 충북 청원의 톡 쏘는 초정약수 맛보다 더 당기는 매력있는 맛이었다.

단풍나무에서 채취했다는 고로쇠물, 그 물맛은 사람의 영혼까지 서늘하게 씻어주는 것 같았다. 


맛 뿐일까? 고로쇠 물은 일명 골리수(骨利水)라고도 불리우는, 뼈에 유익한 물이라고 한다.

원효스님과 백운산의 이야기가 있다. 원효스님은 오랜 수행으로 무릎이 펴지지 않았다고 했다. 무심코 나무 가지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받아 먹고 곧바로 일어섰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 물이 고로쇠물이었고 이후 민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고로쇠물의 효능은 관절염에서 다이어트,  피부미용까지 거론되고 있다.

"얼마든지 있으니 더 마셔 봐라! 온갖 병 다 떨쳐버리고 가거라 마!"

공양주 보살은 연속 고로쇠물 주전자를 주지 스님 방으로 들여다 놓았다.

통광스님께서는 친구와 나에게 마음이건 몸이건 간에 떨쳐버려야 할 삶의 어떤 병소病巢라도 있다고 여긴것일까.


지리산 자락에서 채취한 고로쇠물은 노상 읽고 쓰고 품어도 다함 없는 부처님 말씀과도 같이 전혀 질리거나 실증나지 않았다.

우리는 계속 고로쇠물을 마시고 마셨다.

그래서였을까. 봄에 이어 그해 내내 나는 골골하지 않고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다.

물만 잘 마셔도 건강을 유지하는 비법이 고로쇠물에 숨어 있었던 것일까.


다시금 고로쇠물 철이 돌아왔다.

나는 고관절을 다쳐 두달 넘게 고생 중이니 지리산 자락의 칠불사에 가는 건 엄두도 낼 수 없다.

도시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지리산 자락에 둥지를 튼 친구에게 부탁을 해야겠다. 지리산의 고로쇠물을 마시고 싶다고.

친구는 내가 얼마나 간절하게 칠불사의 범종소리를 듣고 싶어하는지, 화개에서 칠불사로 가는 벚꽃길과 범왕리의 패랭이 꽃, 쑥부쟁이꽃을 사랑하는지 잘 헤아리고 있을 것이다.


지리산의 풀향기를 묻혀 올 고로쇠물을 기다린다. 고로쇠물의 추억을 떠올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