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받으려고 하니까 외로운 거야
. 그 희망을 버려. 외로움이 외로움으로 느껴지지 않게 하려면.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외로운 존재야. 외로움에 대해서 인식이 없다면 그는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했다고 볼 수 있어. 동물은 외로운 감정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할까. 숫제 인식조차 하지 않을까. 그러면 꽃들은 어떨까.
나는 혼잣소리로 중얼중얼하면서 밤늦은 인사동 거리를 지나갔다. 전통의 거리 문화의 거리라는 인사동의 밤은 서울 시내의 어떤 동네보다도 먼저 밤이 온다. 그 밤은 깊은 고요 속에 갈앉아 있어서 인적 뜸한 밤길이 두려울 정도다.
떡집이 많은 낙원동이야 상점 문을 일찍 닫아도 이상할 것이 없는데 고풍스럽고 유서 깊다는 인사동 골동품이며, 붓 가게, 화랑이 운집되어 있고 전통찻집이 많은 인사동 거리의 이른 철시는 묘한 반감까지 불러일으킨다.
묘한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인사동의 밤거리에 수줍게 피어난 분꽃 한 포기. 조상에게 물려받은 재산이나 애써서 벌어놓은 재산이 없는 집에 자식만 여럿 태어나 자랑하고 내세울 거라곤 장차 어떤 목재가 될지 예상하기조차 어려운 올망졸망한 애들뿐인 빈한한 집안 풍경 같은 분꽃 한 포기. 대형의 고무함지에 심겨져 벌어지는 대로 휘어지는 대로 가지를 뻗치고, 이우는 달빛 속에 보면 그 나름대로 사랑스럽고 예쁘게 보이는 분꽃. 층층시하 식구 많은 종갓집 맏며느리가 분주하게 일에 쫓기다가 이제 막 일손을 놓고 앞치마에 손을 문지르며 툇마루에 나앉아 가슴을 펴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분꽃은 서민적인 꽃이다. 시골의 너른 마당이나 장독대 옆에서 더 잘 어울리는 꽃. 시계가 귀하던 시절에 보리쌀 삶는 시간을 일깨워주던 부지런한 아낙네 같은 꽃. 도시의 한복판에서 밤마다 만나는 분꽃은 밤길 걷는 나의 외로움을 비집고 들어와 보아주세요 예뻐해 주세요! 하고 외치는 것만 같다.
분꽃은 가장 한국적이면서 고향집을 생각나게 하는 꽃임으로 해서 나는 그 앞을 태연히 지나치지 못한다. 저녁 해거름에 피기 시작하여 밤새 저 혼자 피어 있다가 아침 해가 돋을 때 살며시 꽃잎을 여미는 꽃. 새로 생긴 화랑 건물 앞에 뽐내듯 서 있는 거추장스러운 핑크색 리본을 단 화환이며 행운목 자스민 화분과는 아예 견주어볼 수 없을 만큼 조촐한 꽃. 귀하고 부한 것보다는 이른 봄 대소쿠리를 들고 성급하게 냉이를 뜯으러 나온 시골 계집애 같은 맵시의 분꽃. 흰색 분홍색 노란색과 핑크가 섞인 것 등 색깔도 어쩌면 은은하고 소탈한 것뿐일까. 눈여겨 보아주지 않으면 무심하게 지나치기 쉬운 작은 꽃. 나는 종로방향으로 걸어가면서 분꽃 같은 사람들과 숱하게 마주친다
. 밤늦게까지 거리에서 시간을 보낸 많은 얼굴 속에서 나는 분꽃을 보는 것이다. 누구의 간섭도 감독도 받지 않고 즐겁게 취한 밤의 술꾼과 연인들에게서 나는 분꽃의 자유를 만난다. 결코 화려하지 않은 저녁 시간을 보낸 포장마차의 단골손님들. 그 중에는 어쩌면 채털리 부인의 애인같이 생긴 남자도 있고, 직장 경력이 짧거나 호주머니가 얄팍한 대학생과 그들의 짝꿍들이 있다. 나는 왜 분꽃을 두고 외로움을 떠올리며 또한 채털리 부인의 애인을 생각했는지 알 수없는 채로 분꽃 닮은 사람들에게 담뿍 친근감을 느낀다.
사람들이 분꽃 같고 분꽃이 사람 같은 착각 속에 서 있노라면 지나가는 여자들 모두가 무작정 꽃으로 보인다. 꽃이고자 하는 몸짓. 값싼 귀고리 팔찌를 건 모양새며, 진한 화장과 그 냄새, 하체를 거의 노출시킨 초미니 차림들. 누군가 꺾어주기를, 보아주기를 바라는 꽃들의 생리를 나는 길에서 눈 시리게 목도하는 것이다. 밤거리에서 보는 분꽃과 여인들.
꽃이기 위해 부단히 몸부림치는 젊음의 활력이 오히려 분꽃보다 더 처절하게 보여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한다. 누군가의 시선을 모으고 싶고, 사랑받기를 갈구하는 피나는 노력과 아우성은 애초부터 촌스럽고 수수하게 피어난 분꽃에 비한다면 차라리 눈물겹다.
나는 언제나 한 송이 꽃이고 싶다.
너를 위해
꽃잎을 닫고 한없이
풍성한 그 꿈의 밤이 끝나고
새벽과 함께 피어날 때
꿈의 정수를 일시에 활짝
흩뿌리는 그런 꽃이고 싶다.
꽃의 소원. 꽃의 갈망
- 히메네스의 ‘꽃’
분꽃에게도 똑같은 분량의 소원과 갈망이 있을까. 꽃이 되고 싶은 여인들이 간절한 꿈. 나는 히메네스의 ‘꽃’이라는 시를 맘속으로 외우며 꽃이 되고 싶은 여인들 곁을 지나서 좌석버스에 오른다.
에어컨 바람을 감소시킬 만큼 꽉 찬 사람들의 열기. 나는 간신히 빈자리를 찾아 않는데 옆에 앉은 남자가 누군가를 닮아 있다. 어디서 본 누구였나? 머리를 갸웃거리며 생각해 낸 것은 인사동 거리의 포장마차에 앉아 있던 바로 그 사람, 채털리 부인의 애인을 닮은 남자였다.
친절하게도 그는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창가로 자리를 옮겨주어 내가 앉는데 불편을 덜어준다. 채털리 부인의 애인을 만난 것은 밤길의 행운이다. 하루를 성공적으로 마감하게 하는 이런 경우에 분꽃은 누가 되는 것인가. 나도 역시 하나의 꽃이고 싶은 건가. 그렇게 별 도리 없이 꽃이 되어야만 하는 것인가.
과로에서 오는 울적함과 또 한편 은밀하게 솟는 장난기. 적어도 그가 채털리 부인의 애인이라면 분꽃이 되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미묘한 웃음을 흘린다. 밤길의 외로움과 인사동의 분꽃. 포장마차와 술꾼, 분꽃 닮은 그들의 여자 친구들. 동교동 로터리까지 이런저런 상념들로 대체로 지루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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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버넷문화예술관 운영위원 변영희 기자 haeving@silver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