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지리산 바람이 불어온 것은 20년 전이던가.
내 생애 최초의 장편소설 <마흔넷의 반란> 3권을 1년 여에 걸쳐 쓰고나서 혹독한 몸살을 앓고 난 연후라 어디로든 쉴 곳을 찾아 떠나고 싶던 차였다.
"밤낮 한 곳에서만 지내면 무슨 글이 써지나?'"
힐난 비슷한 친구의 전화가 도화선이 된 것일까. 여기 저기 다녀봐야 글감도 새롭고 참신한 문장이 떠오를 거라면서 당장 짐을 챙겨 나오라는 말에 별 준비도 하지 못한 채 곧바로 지리산을 향해 달려갔다.
무엇 하나 남쪽 지방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상태였다. 남쪽 지방이라면 .6.25 때 피난간 곳과 부산 대구 정도뿐으로 전주 남원 구례를 거쳐 화개장터로 가는 길은 조영남의 노래 화개장터' 가 고작이었다.
친구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경우였다. 시집도 안간 세 자매가 운영한다는 한 찻집에 둘러 유명한 하동 녹차로 목을 축이고 친구와 나는 쌍계사가는 길목에서 일단 숨을 돌렸다. 그 찻집은 언제나 지리산의 칠불사, 혹은 쌍계사 가는 도중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쉬어가는 곳이 되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 찻집은 그때 그 자리에 있고 별반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오히려 달라진 게 없어 보이는 그 점이 살뜰한 정을 깊게 한다.
그렇게 시작한 지리산 나들이가 한동안 월례행사처럼 이어지다가 늦으막하게 시작한 제도권? 공부 과정으로 중단되고 나는 지리산에 대한 그리고 하동 지역의 순후한 민심이며 그윽한 차향이며를 까맣게 잊고 살았다. 친구가 사업체를 정리하여 그곳에 둥지를 틀고 안주하였으나 지리산 가는 길, 칠불사의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 성불이야기며 아자亞字방의 전설이 아득히 멀어지고 있었다.
지난 봄 나는 박사논문 탈락의 고배를 안고 탈진상태로 무려 십 여 년 만에 섬진강을 돌아 하동 지방에 내려갔다. 그리고 여름에 또 한 번 가서 영맑은 비구니스님 한 분과 인연이 닿았다.
며칠 전 산막이나 토굴을 구하는 도반 몇 명과 함께 그곳엘 또 다녀왔다. 계룡산의 기운이 제아무리 좋다해도 지리산만 하겠냐며 소시때 지리산 암자에서 행자로서 수행한 경력을 갖고 있는 00시인은 그곳의 산하에 남다른 애정을 보이며 내려와 살 뜻을 내비쳤다.
1500미터는 조히 됨직한 00 선원 수좌가 캐준 지리산의 오묘한 골짜기 형상을 닮은 고구마 맛에 감동을 받은 것인가. 그녀의 결정이 성급한 면이 있었지만 반대는 내 몫이 아님을 알고 있다. 머물고 싶은 곳이기도 하지만 그저 가끔씩 지리산 바람이나 쏘이면 좋을 듯 싶은 것이 내 생각이었다.
계곡 언저리에 보얗게 만개한 여뀌꽃이 애달프고 쭉쭉 뻗은 소나무 군락이 의연하지만 산(山)사람이 되기엔 세속 때가 내게 너무 두터운 것인가.
갈 때는 의기투합하여 먼 길 달려갔으나 아. 그러나 지리산 이주에 대한 결심은 나에게 많은 것을 숙제로 안겨준다.
11월이 되기 전에 아니 산붉은 철, 만산홍엽이 섬진강 강물을 화려하게 물들일 때 즈음하여 홀로 조용히 가보는 것인가. 바람과 물과 하늘과 구름과 그리고 산의 수다한 생명들과 더불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터전을 기대해도 좋을까.
지리산 바람은 나에게, 이곳 화정 별빛마을 한 가운데로 지금 거침없이 불고 있다.
"어떠셨어요?"
00시인의 전화가 귀에 쟁쟁하다.
"그냥 바람이야. 지나가는...."
긁은 별들이 무리져 반짝이던 지리산의 밤은 쉬이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 정진철 | 09-10-21 21:53 |  | 그런데 말입니다 그 칠불사 가는길에 쉬어가는 누각이라고 친구가 하던 모텔이 있는데 그곳에서 하루밤 유숙하셨으면 거기도한 딧마당에 쏟아지는 물소리 새소리 바랍소리가 일품인데 미리 알려 드렸으면 좋을것을 그랬네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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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영희 | 09-10-22 09:13 |  | 지리산 깊은 자락 어디를 보아도 여유와 풍요로움이. 마치 정진철 선생님의 우람 장대한 체구 속에 숨겨진 서정, 낭만, 꿈, 유머처럼, 독특하고 재밌는 분이 작가회 오신 것 감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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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재문 | 09-10-22 20:53 |  | 왕송호수의 바람만 좋은 줄 알았더니 지리산 바람이 그렇게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 군요. 저도 지리산 천왕봉에 올라가본 사람입니다. 고사목도 구경했구요. 지리산의 추억이 떠오릅니다. 감사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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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영희 | 09-10-23 11:16 |  | 이른 아침 지리산 고구마를 캐서 그곳에 사시는 분이 우리들에게 나누어 주셨어요. 이걸 들고 와야 하나 무거운데 모과 두 어개만 들고 와야 하나 망서리다 아! 정성을 안고가는 거다. 지리산 기운을 받아가는 거다 이쯤 생각하고 끌어안고 서울까지 왔더랍니다. 지리산 구석구석에는 빨찌산도 아군도 아닌 그야말로 사람의 숨결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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