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구름 잔뜩 머금고 몇 날 며칠을 벼르기만 하더니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졌다.
지하철에서 밖으로 나오자마자 양산 살이 부러져 축 쳐진다. 빗물이 얼굴을 때렸다. 어떻게 하나.
집으로 되돌아가는 거리와 내가 〇단지로 걸어가야 하는 거리를 잠시 헤아려보는 사이 전신은 훔씬 비에 젖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매한 시점이었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빗속을 걸어갔다. 장대비는 순식간에 내 머리와 얼굴에 작은 시냇물을 만들고 줄줄 흘러내렸다. 바람결도 사나워진다. 거센 바람에 몸 중심이 잡히지 않아 뒤뚱거리기를 수차례, 나는 간신이 〇단지에 이르렀다.
그날은 아침부터 땡볕이었다. 8월 내내 폭염의 연속이었다. 더구나 대구 지역의 온도는 유난히 더 높게 느껴졌다. 딸과 나는 꼭두새벽에 서울역으로 달려갔다. 며느리가 입원해 있는 대구 보훈병원을 가기 위해서다.
기왕 대구에 가면 그 유명한 팔공산 갓바위에도 올라가리라. 갓바위에서 간절히 기도하면 적어도 한 가지 소원은 이루어진다는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며느리의 기적적인 쾌유를 , 아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KTX 에 올랐다.
졸며 시름하며 1시간 50분 만에 동대구역에 도착했다.
역에서 내려 팔공산 갓바위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는 등산객들로 만원이었다. 울긋불긋 화려한 복장의 등산객들은 즐거워보였다.
버스에서 내린 순간부터 우리의 고행은 시작되었다. 팔공산으로 가는 코스가 여러 갈래이듯, 등산객들을 따라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노라니 만감이 교차했다. 왜냐하면 험한 산길을 허위허위 걸어 갓바위에 오를 정도로 며느리의 생사가 경각에 달린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었다. 최후의 방법으로 부처님의 가피에 기대하는 것 빼고는 며느리를 살릴 다른 방도는 없는 것일까.
'어차피 죽을 사람인데 무슨 치료를 더 해요? '
국립암센터의 안하무인, 오만방자한 젊은 여의사 말에 참다못한 아들이 며느리의 의견을 물어 보훈병원으로 옮겨오긴 했지만 그곳에서도 연일 채혈과 검사의 연속이라고 했다. 성한 사람도 못 견딜 일을 죽음으로 가는 환자가 매일 같이 겪어내야 하다니, 그 소식을 접하고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큰 충격이었다. 영양제 주사와 수혈을 해도 모자란 판에 채혈이라니. 며느리의 특이한 혈액형이 유용한 데가 있어서인가? 기가 막힌 장면이 벌어지고 있었다.
차라리 집으로 가서 가족들과 단 얼마동안이라도 함께 지내면서 이별을 준비하게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러나 이미 모든 것은 늦어 있었다. 애시당초부터 병원에서는 며느리를 살리지 못한다는 사실, 살리기는 고사하고 더 신속하게 죽음으로 몰고가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병원의 일방적인 프로그램에 응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딱했다.
생애 처음 올라가는 팔공산 갓바위 가는 길은 왜 그리 멀고 험한지. 늦여름 땡볕은 또 얼마나 살갗을 뚫을 듯이 맹렬한지, 바위에 앉아 잠시잠깐 쉴 때, 나는 내 앞에 닥친 비극적 상황이 야속했다. 견딜 수 없이 슬펐다. 쉬고 앉고 하면서 가쁜 숨을 진정하기를 몇 차례, 우리 뒤에 따라오던 사람들이 우리를 앞질러 하나 둘 자취가 멀어질 때에 이르러 팔공산 자락은 더욱 아득히 멀어만 보였다.
요행수가 희박한 일, 땀 흘려 올라가는 이 발걸음에 무슨 의미가 있을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렇다! 한 가지 소원은 이루어진다는데, 하면서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두 시간 여 만에 팔공산 갓바위 부처님 전에 다다른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바닥에 앉았다. 죽기 살기로 달려온 팔공산 갓바위 부처님을 대하자 눈물이 주르르 쏟아졌다.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다만 눈물밖에는.
‘살려주세요. 어린 아들이 둘이예요. 이제 서른여덟 살이예요. 벌써 데려가면 애들은 어쩌라고요. 영험하신 법력으로 기적을 보여주세요.’ 쉴 새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수습할 겨를도 없이 나는 마음속으로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기도를 마치자 서둘러 산을 내려갔다. 더 이상 몸을 움직일 수 없이 기진했다. 집에서 출발한지 7~8시간이 경과했다. 택시를 탔다.
병실에는 오랜 간병으로 지쳐있는 아들과 며느리의 친정어머님, 그리고 그 지역 교구에서 나온 수녀님 일행이 계셨다.
발병 전의 발랄하고 생기 넘치는 모습 대신 도저히 숨 쉬는 사람이라고는 상상이 되지 않는 며느리. 57kg이 25kg로 감소된 참람한 모습을 대하자 울컥! 분노가 치솟았다. 슬픔이 북바쳤다. 절망이었다. 대체 병원에서는 여태 뭘했다는 거야?
수녀님이 며느리의 세례명을 불러주며 서울서 시어머니가 오셨다고 며느리 귀에 대고 속삭였다. 순간 죽은 듯 미동하지 않던 며느리의 동공이 활짝 열렸다. 한참 그렇게 눈을 크게 뜬 상태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며느리의 야윈 손을 꼬옥 쥐었다.
“동윤 에미야! 미안해! 내가 거짓말을 한 게 돼버렸어. 나는 네가 그리 쉽게 스러질 줄은 예상하지 못 했어. 아니 살아난 줄 알았다고. 수술 후 3년 여 동안 너는 평상시처럼 잘 먹고 건강했잖아. 학교에 출근 안 하고 애들하고 맛난 것 만들어 먹고 체험학습, 놀이공원 가는 게 그렇게 행복했다고 하지 않았니? 매주 KTX 타고 가족과 함께 서울 올라가 가족은 암센터 근처에 유숙하고, 너는 일등 병실에 입원하여 검사받고 치료받으며, 경과가 순조롭고 양호하다고 하지 않았더냐? 앞으로는 3개월에 한 번씩만 체크만 받으러 오랬다면서 ‘이제 학교에 출근해도 되겠어요!' 너는 깡총깡총 뛰지 않았니?
나는 분명히 들었구나. 의사 선생님이 다른 데 전이도 안 되고 상태가 매우 좋다고 했다는 그 말. 네가 의사 말을 믿었듯이 나는 담뿍 기대에 젖어 있었어. 의사가 거짓말 하는 걸 너 보았니? 아니잖아. 의사의 말은 천금보다 더 무게 있고 신뢰성이 가는 거 아니겠니. 그런데 은우야! 너는 그 말을 들은 지 불과 몇 시간 안 돼서 물 한 모금도 목안으로 넘길 수가 없다고 했어. 위내시경 검사할 때 늘 보던 사람이 아닌 생소한 얼굴이 검사를 했고. 그날따라 엄청 아팠다고. 왜 밥은커녕 물조차 마실 수가 없게 된거지? 수술부위를 잘 못 건드린 것일까? 의사가 허언을 말했을까. 오진일까. 의료과실인가. 대체 무슨 이런 일이 다 있니? 너는 살아난 거였어. 그런데 살아났다가 검사받은 그날 부터 죽음으로 가는 급행열차로 갈아탄 거야. 내달린 거란 말이다.”
“나는 너에게 한 없이 미안하고 미안하다. 내가 네가 반드시 살아날거라고 거짓말 한 게 되었으니 이 노릇을 어찌하면 좋으냐. 은우야! 나는 이 세상 살면서 거짓말을 가장 싫어한단다. 거짓말 하는 사람과는 사귀지도 않아. 의사 선생님이 거짓말을 할 까닭이 없지 않겠니? 너는 살아났다가 급속도로 죽음의 골짜기로 내 몰린 거야. ‘너는 살아날 거야. 살아났어. 이제 살아 난거야! ’ 라는 내 말이 결과적으로 너에게 거짓말이 되었구나. 사과하마. 진심으로 용서를 빈다. 거짓말이 될 줄 누가 알았겠니?”
바로 그날밤. 팔공산 갓바위 올라갔다가 너를 만나고 온 그밤. KTX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나는 며느리의 부음을 들었다. 눈꺼풀에 경련이 일었다. 무릎이 후루루 떨렸다. 은우는 내가 오기를, 나에게서 무슨 말이라도 들어보려고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아니구나! 죽는 구나!' 그렇게 죽음의 수렁텅이로 곤두박질 친 게 틀림없어 보였다. 8월15일 광복절 밤이었다.
산적에 간을 맞추고 전여를 구워내는 아들 옆에서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회오와 자책을 거듭하느라 탕국에 넣을 무를 썰다가 손을 베일 번 했다. 내 마음이 암센터로, 팔공산 갓바위로, 대구 보훈병원 병실로 들고나기를 거듭하는 가운데 제사상은 여법하게 차려졌다. 아플 때 찍었으나 여전히 밝게 웃는 며느리의 얼굴. 훌쩍 커서 씩씩한 소년 티가 나는 두 녀석들이 제사상에 잔을 올리고 절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우리 가족은 또다시 피울음을 삼켰다.
며느리 제삿날은 슬픈 날.
인명은 재천이라 한다. 그러나 끝내 석연치 않은 그 무엇인가가 풀리지 않고 있어 이토록 마음이 괴로운 것인가. (2017.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