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난 곳은 충청북도 청주시, 불교적 명칭이랄 수도 있는 남섬부주(南贍部洲)의 南 자, 고을 州 자, 남주동이었다. 집 앞의 큰 골목을 지나 성 둑에 오르면 바로 눈앞에 청주시의 상징이기도 한 무심천이 유유히 흘러갔다.
무심천은 모래 빛깔을 닮은 모래무지와 새끼 미꾸라지, 화려한 몸피를 흔들며 유영하는 물뱀의 모습까지 훤히 드러나 보일 정도였다. 무심천 물빛뿐일까. 사람들의 마음결도 맑고 순했다.
그런데 난 테 없이,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38선이 무너졌다나! 북괴 탱크가 의정부를 거쳐 문산을 지나간다나! 흉흉한 소식이 전해지고 며칠 안 가 앞집 순자 네, 뒷집 부뜰이 네, 큰 우물집 진구네, 청식이 네가 모두모두 살림살이 이고지고 혹은 소달구지에 매달고 어디론가 떠나가 버렸다.
어머니가 전화통이 부서져라하고 두들겨댔지만 교환양은 어딜 갔는지 아버지와 연결이 되지 않았다. 래디오 방송은 사흘 동안만 피난 갔다 오면 전쟁이 끝나 세상이 예전처럼 평화를 회복한다는 이야기인 것 같았다. 사태는 급변했다. 하는 수 없이 어머니의 단독 지휘와 인솔아래 피난 준비가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열여섯 살 큰 딸 밑으로 아들 둘과 딸 4명을 거느리고 오로지 남쪽 방향으로 밤을 새워 걸어갔다. 투명한 밤하늘엔 은하수가 출렁이고, 별들이 유난히 반짝였다.
민족상잔의 6.25 이후 우리 집에 남은 것이라곤 폭격 맞아 무너져 내린 폐허에 깊은 절망과 한숨뿐이었다. 황량한 집터에 천막을 두르고 모여든 피난민들은 피난 나올 때 싸가지고 온 진기한 패물이나 비단 옷가지를 들고 나와 팔았다. 젊은 시절 교사 경험 외에 별로 고생을 모르던 어머니는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음식을 장만하여 피난민과 집을 잃은 많은 사람들에게 제공하면서 전시임에도 먹을 것을 자급자족하는 기지를 발휘했다.
어머니의 장사가 조금 자리를 잡게 되자, 무엇보다도 어머니는 여러 자식들 학교 보내는 일을 챙겼다. 위급한 상황아래서 오히려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았던 것일까. 휴전 이후의 지극히 어려운 제반 여건 속에서도 유난스러울 만큼 여러 자식들에게 초. 중. 고등학교 과정을 놓치지 않게 하려고 열과 성을 다 쏟으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언니의 출가, 두 명의 오빠가 군 입대로 집을 떠나자 어머니는 한 시름 놓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때부터 건강에 적신호가 왔다. 그동안 몸을 혹사시켜온 때문에 어머니는 많은 날을 누워 지내다시피 했다. 어머니는 서서히 자신의 삶을 정리하려는 기미를 보였다. 어머니는 나에게 대학 진학 대신 조기 결혼을 권하고, 동생들에게는 상업학교 계열에 진학하도록 독려했다.
내가 선택할 수있는 길은 스스로 자급자족해야만 한다는 그것밖에 없었다. 나는 부득이 여학생에게 장학혜택이 가장 후하다는 대학에 입학 하고 나서 어머니와 가깝게 지내는 S대 교수 사모님에게 부탁하여 그 댁에 가정교사로 입주했다. 그 댁에서 내가 하는 일은 초등학교 2년생인 어린 소년의 일과진행과 공부를 돕는 일이었다. 내 적성에도 맞고 집에서의 무거운 공기와는 다르게 편안한 일이었다. 그 외에 그 교수님 소개로 다른 교수님 책 집필을 돕는 일이 추가되었다. S대생과 함께 매일 200자 원고지 100매씩 쓰고 교정도 보았다. 책 출간과 동시에 한 학기 등록금이 거뜬히 해결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타의에 의한 방랑생활은 아버지의 생명을 단축시켰다. 나는 병약한 어머니와 시집간 언니로부터 자유롭기가 힘들게 되었다. 물심양면으로 친정집을 돕고 있는 큰 언니는 ‘네가 결혼해야 어머니 병환이 낫고 집안이 편안해 진다’는 논리를 앞세우면서 결혼을 종용했다. 결혼 강요에 못 이겨 나는 전격적으로 학교를 옮겼고 L교수님 댁에 입주하게 되었다. L교수님 내외는 두 분 다 잘 나가는 현역 작가로 배울 것도, 읽을 책도 지천이었다. 가정교사 시절보다 문학도로서의 내 일상은 훨씬 업 된 감이 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흔히 묘령의 처녀가 겪는 그런 흔해빠진 세간의 근심걱정이 잠시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애초 결혼 의사가 전무한 나에게 내 언니가 그랬듯, L교수님 역시 갑자기 결혼이야기로 나를 불편하게 했다. 그 댁에는 여러 가지 명분으로 주로 여자대학생들을 기용? 했는데 내가 그 몇 몇 중에서 첫 번 째 타킷이 된 셈이다.
나는 교수님 댁에서의 모든 일을 접었다. 장래의 내 꿈도 내려놓고 교수님이 강력 추천하는 상대와 자의반 타의반 극적으로 결혼하기에 이른다. 처음 입주할 때 나에게 ‘교수로서의 품성, 자질을 충분히 갖추었다면서 자신의 후계자가 돠라’ 던 L교수님의 약속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었다. ‘비를 피해 갔다가 우박을 맞는다’는 그런 셈이었다.
아이들이 커갈수록 나의 고민과 고생살이는 증가했다. 아, 바로 이런 것이 악연이라는 거구나. 하고 나는 거의 자포자기하는 심정이었다. 하루도 기쁨이나 보람을 맛 볼 수 없는 형극의 시간이 무참하게 흘러갔다.
나는 몇 년 동안 함께 지낸 L교수님에게 편지로 하소연 하는 게 전부였다. 교수님은 그럴 때 하나님을 만나러 교회에 가라고 했다. 또 현재의 어려움을 작가로서의 수련과정으로 알고 열심히 글을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L교수님의 10명의 제자 중 내가 가장 실력이 좋았다며 용기를 내라고 했다. 그러나 ‘어지간해야 하루 벗을 한다’는 속담처럼 펜과 원고지만 있다고 글이 술술 써지는 것은 아니었다.
“집사님도 대학가에 스포츠 매장 하나 내 보세요. 사람 따로 둘 필요 없고 수입도 꽤 짭짤해요.”
이웃에 사는 권사님이 구역 예배를 보러 간 나에게 앞말도 뒷말도 없이 불쑥 한 말이었다. 딸 셋을 모두 출가시키고 은행 지점장으로 은퇴한 남편과 큰 저택에 살면서 심심풀이 겸 스포츠 용품 매장을 열었다고 했다. 돈도 돈이지만 자기만의 일을 가져야 생기가 난다고 말했다. 나는 귀가 솔깃했다.
그렇다! 기왕이면 돈도 벌고 내 생활을 혁신시키자. 나는 내 참신한 포부를 남편에게 통보했다.
“여자가 주제넘게 무슨 사업?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 않다고요.”
재고의 여지도 없다는 듯 그는 내 말허리를 뚝 잘랐다.
“당신 내가 얼마나 힘들게 살림을 꾸려 가는지 알기나 아세요? 돈도 벌고 시간활용도 하게 제발 자금 좀 대 주세요.”
나는 남편의 회사까지 찾아가서 간곡하게 말했다. 요즘 세상에 여자도 집에만 있어서는 안 되고, 기실 아이들 학자금이 한두 푼 드는 거냐고 슬쩍 그간의 남편의 공로를 치켜세웠다.
가게를 운영하면서 남편의 봉급에만 의존하던 때보다 살기가 훨씬 풍족하고 수월해졌다. 일일이 남편에게 고하지 않고 아이들의 필요에 응해줄 수 있고, 세상과 사람을 보는 안목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나는 눈부시게 변모 발전하는 세태에 한 참 뒤쳐져 있는 자신에 대해 새롭게 눈을 떴다.
그러나 나는 덜컥 병이 났고 더 이상은 가게를 지속할 수도, 몸이 아파 병원비 지출이 무한정 늘어 저축을 더 늘릴 수도 없게 되었다. 밤늦어 집에 돌아가면 집안 살림은 살림대로 나를 옭아맸디. 어머니, 언니, 그리고 L교수님과 주변사람들의 걱정이 대단했다. 나는 가게를 접어야 했다. 남편이 집에 돌아오면 언니 말대로 매운탕이라도 맛나게 끓여주어야지, 하는 다부진 생각도 했다.
집으로 복귀하자마자 나는 죽자 사자 앓았다. 허리를 펼 수 없이 아팠다. 종일 앉아 있어도, 누워 지내도 동일한 통증이 따랐다. 쉬면서 섭생을 잘 한다고 해도 쉬이 나을 아픔은 아닌 것 같았다. 삼성의료원에 갔다. 단순한 디스크 차원이 아니라 척추분리증 척추관 협착증 등, 4가지 심각한 증세로 곧 수술을 서둘러야 한다고 진단 내렸다.
“집안 살림도 벅찬데 장사를 하면 안 된다는 걸 알았어야지. 내가 오죽 너를 잘 알아 M사장하고 혼인하라고 했을까봐.” 언니의 넋두리에 이어 “산꼭대기에서 우물물 길어다 밥하고 기저귀 빠느라고 네 허리뼈가 진즉에 내려 앉았나보다. ”
어머니가 혀를 끌끌 찼다.
삼성의료원의 수술기간은 뼈를 깎아낸 살인적인 통증으로 내 혼(魂)이 몽땅 날아갈 정도였다. 퇴원하고 집에 돌아온 나는 투병생활을 이겨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병원에서 4시간 간격으로 맞던 진통제를 맞지 않으니 아! 소리도 안 나오게 지글지글 아퍘다. 전신이 통증으로 꽁꽁 뭉친 듯했다. 수술은 아픔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둘째가 빌려다 주는 미국의사 ‘로빈 쿡’의 소설, 의학시리즈는 내게 최상의 위안이고 유용한 소일거리였지만 나는 점점 독서는커녕 밥도 약도 먹을 수 없이 수술 후유증으로 시달렸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나는 울고 울었다.
“엄마! 엄마는 공부 말고 잘 하는 게 뭐가 있나? 엄마 지금이라도 공부를 다시 시작해보는 게 어때?”
둘째가 울고 있는 내 등을 또닥거리며 말했다.
“영희는 노래 잘하는 것 빼고 잘 하는 게 또 뭐가 있지?”
나는 불현듯 어릴 때 아버지의 익살이 생각났다. 아버지를 떠올리자 용기가 불끈 솟았다. 그 후부터 내 인생의 전환점이 눈앞에 또렷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3~5년의 지리한 투병 생활을 마감?한 나는 둘째의 안내를 받으며 중국문학으로 출발, 현재 불교문학에 이르고 있다.
“공부하려면 엄마, 우선 잘 먹어야 해.”
둘째는 각종 과일과 먹을거리를 바리바리 실어 날랐다. 외국에 간 큰 아들과 딸아이도 물심양면으로 나를 도왔다.
“그 공부해서 교수를 할 군번도 아니고 뭘 그렇게 투자를 많이 해요?”
“여행도 다니시고 그동안 안 해본 사랑도 하셔야죠.”
“공부요? 젊은 우리도 때로는 끔찍해요.”
남이야 뭐라 하건 말건. 몇 년 전 집안에 큰 불행한 일이 닥치므로 늦은 공부가 그 기간이 연장되었으나 이미 내 삶의 일부로 체화(體化)된 공부에 나는 나의 노년을 기꺼이 헌납하고 있다. - 출처 : 실버넷뉴스(6.15)
변영희 : <동창회 소묘(素描)>소설, <풍매화>수필 등단. 무궁화문학상 대상. 손소희소설문학상. 한국수필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3부작『마흔넷의 반란』.『황홀한 외출』『오년 후』소설집『영혼 사진관』『매지리에서 꿈꾸다』수필집『비오는 밤의 꽃다발』『애인 없으세요?』『문득 외로움이』『졸병의 고독』『엄마는 염려 마』『뭐가 잘 났다고』『갈 곳 있는 노년』『몰두의 단계』』『나의 삶 나의 길』『거울 연못의 나무 그림자』E-BOOK『사랑파도를 넘다』『이방지대』등 15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