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사춘기의 사랑

능엄주 2017. 5. 26. 21:47

사춘기의 사랑


나는 사춘기의 사랑을 도깨비라고 말하고 싶다.

아주 어렸을 때 옆집에 살던 진규 네 집에 몰려왔다던 그 도깨비들.

겨울 한밤중에 우당탕탕 소리도 요란하게 집단으로 떼 지어 와서 큰 가마솥 뚜껑을 뒤집어 놓고 그 위에 찬장에 있는 놋그릇, 사기그릇을 모두 꺼내 올리고 갔다던 요상한 도깨비.진규 네 집은 이를테면 도깨비 터라는 거였다.


도깨비 터에 살면서는 도깨비 비위를 거스르지만 않으면 큰 부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 도깨비 집터는 시효라는 게 있어서 어느 기간이 지나면 부자는커녕 폭삭 망하거나 사람이 죽어 나가는 일이 생긴다고 했다. 어쨌든 누구 한 사람 도깨비의 정체를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진규 네 집을 놓고 도깨비의 출현에 관한 소문은 무성하게 꼬리를 달고 이웃 동네까지 퍼졌다.


귀신처럼 한밤중에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도깨비. 가마솥 뚜껑을 뒤집어놓고 그릇들을 엎어놓고 갔다는 도깨비.

또 여의주와 같은 방망이를 얻을 수만 있다면 단번에 벼락부자도 되게 한다는 도깨비. 나의 사춘기 사랑을 감히 도깨비에 비유하는 이유는 알쏭달쏭한 도깨비에 대한 정의 때문이기도 하고 도깨비의 행적이 수상쩍고 모호한 데에도 그 까닭이 있다고 하겠다.


초등학교 시절 교생 선생님들과 송별회를 할 때 6학년 언니들이 도깨비 연극을 한 일이 있었다.

혹부리 영감이 잘못하여 도깨비 소굴에 갔다가 보기흉한 혹을 떼어주고 부자 되는 방망이를 얻어오는 게 연극의 줄거리다. 머리 위로 날카로운 뿔이 달리고 눈썹이 치켜 올라가고 찢어진 눈이 험상궂어 보이던 도깨비.


좋은 목소리가 혹에서 나온다고 믿고는,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하는 요술방망이를 사람에게 내준 어리석고 순진한 도깨비. 나중에 부잣집 영감이 물욕에 씌어서 찾아갔다가 오히려 달고 간 혹 말고 또 하나 혹을 붙여서 왔다던 도깨비 이야기는 유머가 풍부했던 옛사람들의 정서를 헤아려볼 수 있게 했다.


도깨비는 한 번도 본 일은 없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괴이쩍고 재미있고 신명이 났다. 또 한편 허무맹랑하고 실소를 자아내게 하기도 했다.


나는 사춘기가 시작되는 초등학교 5학년에서부터 복잡한 세상살이에 눈뜰 무렵인 고2까지를 도깨비 시절이라고 이르고자 한다. 사랑 같지도 않은 사랑을, 하는 것 같지도 않게 하면서 홈빡 밤을 새우며 부치지도 못하는 편지를 썼다는 것, 이일 자체가 도깨비에 해당된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게다.


초등학교 5학년 여름방학에 이른바 임간학교가 개설되고 대구에서 전학 온 민석이란 남자애가 임간학교의 반장이 되었다. 청주 애들보다 말씨가 빠르고 악센트가 강한데다가 얼굴은 가무잡잡하고 키는 후리후리 컸다. 그 애의 매력이라면 이렇게 대단한 것도 못되었다. 


 갑(甲)반 을(乙)반 전부 합친 여자애들이 모두 그를 좋아했다. 임간학교의 반장이 되자 그애 인기는 절정에 달했다.

그 애의 구령에 맞춰 식사를 하고 모든 행동을 제압 받아야 했다. 그 애는 자신의 권력을 자칫 남용하고 오용하는 일까지 있어 밤중에 화장실에 가는 것까지 허락을 받도록 강요했다.


여자애들은 종종 연애편지라는 것도 써 보냈고 벌써 민석이와 화자는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둥 화자보다 얼굴이 예쁜 광희가 먼저 좋아했다는 둥 모여 앉기만 하면 참새방아를 찧었다. 나는 그러나 먼발치에서 그리움을 담은 눈길이나 보내면서 비교적 점잖은 짝사랑을 앓아야 했다. 남자애한데 연애편지를 쓴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아마도 화자나 광희만큼 내 사랑은 뜨겁지 않은 연유였는지도 모른다.


중학교 3학년 때, 나의 언니에게 누님, 누님하면서 따르던 청고생淸高生이 있었다.

목소리가 약간 탁음이었지만 깊은 눈과 날카로운 콧날이 매력적이었다. 내가 대문을 열어줄 때마다 싱긋 웃는 것이 전부고 그는 나에게 아무 말도 걸어주지 않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싱그러운 웃음이 뇌리에 사무칠 줄이야. 이것은 사랑인지 최면인지, 그의 싱긋 웃는 웃음을 떠올리면 시험기간 중에도 내 마음은 차분해지지 않았다.


C여고 1학년. 운동선수였던 큰오빠의 후배가 가정교사를 따라 우리 집에 기숙할 때였다.

무슨 남자가 그렇게 이목구비가 확실하게 잘 생겼을까 싶으리만치 특출한 미남이었다. 교회의 여자 친구들이 저녁마다 우리 집 사랑방에 소복하게 모여들었다. 큰오빠의 가정교사는 자주 여자 친구들의 출입에 대해 간섭했지만 그녀들은 막무가내였다.


이번에야말로 막강한 경쟁자들이 있는 터라 나는 미사여구를 총동원하여 밤마다 장문의 편지를 썼다.

무어라고 호칭을 부를지 막막하여 연필을 입에 물고 하염없이 앉았다가 언니에게 들켜서 호되게 꾸지람 듣던 일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렇게 썩 잘 생긴 미남자와 한 지붕 밑에서 살게 된 것이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얼마 후에 그는 서울로 전학을 갔고 나의 도깨비 열병은 시나브로 치유되었다. 그때 내 가슴이 퍼렇게 멍이 들었는지 뜨겁게 달아오르다가 하얀 재로 내려앉았는지는 알 수 없다. 병원에도 갈 수 없는 이상야릇한 증후에 기쁨과 설움 같은 것이 끈끈하게 한데 얽혀 마치 끈끈이주걱에 발목이 잡힌 날파리처럼 다른 일은 진척이 안 되었다.


사춘기 시절에 나와 같은 경험을 갖지 않은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을 것인가.

그러한 열병이 인생을 성숙하게, 폭넓게 해준 것은 아니었을까. 인생의 후반기를 살고 있는 지금에 이르러 돌이켜보면 쓴웃음만 짓게 된다.



어디로부터 불어오는지 행선지나 향방이 불분명한 도깨비놀음 같은 사춘기의 화염을 다시 끌어안을 수만 있다면 지금의 각박하고 건조한 심성에 박진감, 윤택함이 더해지지 않을는지 아쉽기도 하다.


나의 사춘기 사랑의 대상을 언제 어디에서 만나도 이제는 담담하고 여유 있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땐 왜 그리도 떨리고 당황했는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