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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초가 삼간

능엄주 2017. 5. 26. 20:09

어머니의 초가 삼간


이른 새벽.

나는 일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아침체조를 했다.

하나 둘 셋 넷, 둘 둘 셋 넷, 구령도 멋지게 불러가면서. 그런 다음 마당으로 나가서 줄넘기를 백 번 했다. 한 번도 틀리지 않고.

숨쉬기운동을 끝으로 숨을 고르고 들어오니 갑자기 내가 아침에 해야 할 일들이 눈앞에 다가왔다. 아이쿠, 싶은 것이 김칫거리와 빨랫감들을 보자 한숨부터 흘러나왔다.

나는 일하는 손에 신바람을 불어넣기 위해 짐짓 노래를 불렀다.


꽃이 피는 봄이 왔네

아 봄철이 돌아왔네

새봄을 즐겨 꽃그늘 아래

꽃이파리 날아오고

다같이 모여 꽃냄새가 향기로워

꽃그늘 아래 봄기운이 가득찼네

다같이 모여 춤추세

모여 춤을 춰보세

환희의 봄이 찾아왔네

음음- 음음- 찾아왔네


3/4박자의 흥겨운 리듬은 금세 아침을 활기 넘치는 것으로 일변시켰다.

손끝에서 떨어지는 얼갈이배추의 떡잎도 춤을 추듯 했고, 일손은 속도감이 나타났다.

계절이 계절인지라「봄처녀」도 부르고「봄의 왈츠」며「사우(思友)」그리고「목련꽃 그늘 아래서」를 격조 있게 불렀다. 빨래를 주무르는 손길에도 비누거품 같은 기쁨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아이들이 어릴 때, 내가 이렇게 노래를 부르면 큰애는 제 방에서 하모니카를, 둘째는 피리를, 딸애는 바이올린을 들고 나와서 박자를 맞추었다.

일단 발동이 걸리게 되면 한동안은 온 동네가 떠나가리만큼 음악잔치가 벌어지곤 했던 것인데, 아이들이 모두 커서 집을 떠났으니 노래는 나 혼자서 부를 밖에 없다.

세탁기가 윙윙 돌아가는 소리가 훌륭한 반주가 되어서 내 목소리는 더욱 커지고 수돗물 소리가 힘차게 들릴 때 내 목소리의 화음은 자연스러웠다. 두 시간 쯤 노래를 뽑고 나니 얼갈이배추는 맛나게 버무려져 항아리에 들어갔고 별반 힘도 들이지 않은 채 청소와 설거지까지 마칠 수가 있었다.


그 옛날 나의 어머니는 빨래 푸새를 하면서 구성지게 “찔레꽃 붉게 피는”하고 콧노래를 하셨다.

어머니의 레퍼토리는 변함없이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언덕 위의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였다. 

어렸을 때 이 노래를 자주 듣다 보니 오늘날까지 가사 한 줄 잊어먹은 일이 없다. 내가 오늘 아침에 봄노래를 부르며 일손에 박자를 가했듯이 나의 어머니도 “찔레꽃 붉게 피는” 하시면서 산더미 같은 빨랫감에 짓눌리지 않고 경쾌하게 물을 뿌려 밟고 구겨진 부분을 반듯이 펴고 또닥또닥 다듬이질하고 그렇듯 많은 작업들을 수월하게 해치우지 않았나, 여겨진다.


단순히 노래가 좋아서가 아니라 힘든 일을 잠시 잊고 싶거나 힘을 덜 들이고 하기 위해서 노래를 부른 게 아니었을까 헤아려진다.

어머니의 “찔레꽃 붉게 피는……”에 지지 않을 만큼「황성옛터」는 아버지의 우수한 지정곡이었다. 마치 황성옛터의 유민이기나 하듯이 아버지의 레퍼토리도 좀처럼「황성옛터」의 범주를 넘는 일이 드물었다.

얼근하게 약주를 드신 날이면「황성옛터」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는데 그래도 가상한 점은 1절에서 끝내지 않고 2절까지 틀리지도 않고 잘 불러 넘기는 아버지의, 음치를 가까스로 면한 열성어린 가락이었다. 어머니의 “찔레꽃 붉게 피는”에 이어서 아버지의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월색만 고요해”의 황성옛터를 닮은 아버지의 비감한 얼굴 모습이 떠오른다

.

무슨 대단한 지식세계에서 사는 듯 우월감 내지는 풋내 나는 연정까지 곁들어서 부르는 언니의 영어 노래는 또 어떤가. 그런 노래들을 어디에서 누구에게 배운 것인지는 모르지만 새벽 일찍 언니의 골방에서 들려오던 노랫소리. 높은 음으로 부르면서 막힐 때는 핑핑 코를 풀어 곧잘 언니의 노래를 흉내 내고 있던 나를 질리게 하던 언니.


목사 딸을 열애하던 큰오빠는 노래라야 찬송가 종류뿐이었으니 큰오빠의 예술적으로 생긴 얼굴과는 묘하게 어긋나 있던「갈보리 산 위에」도 이아침에 내 노래의 파장 속에 끼어든다.「가고파」라면 단연 작은오빠를 제외시킬 수가 없다.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붉어진 눈시울에 방울방울 눈물이라도 고일 듯 진지한 몸짓으로 부르는 작은오빠의 「가고파」.


노래 속에 상념은 끝이 없고 시간은 어느덧 9시를 넘기고 있다. 어쩐지 오늘은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 우아한 목련꽃이 하늘을 향해 고고하게 개화를 꿈꾸듯이 음악 속에 진행되는 이 아침은 기대 밖의 좋은 일이 예고되어 있는 느낌이 든다.


한적한 산촌에 어머니의 로망인 언덕위에 초가삼간 지어놓고 산찔레 은은한 향내 맡으며 창호지에 흐르는 달빛 벗삼아 가족 모두 어울려 한바탕 노래잔치를 벌여보는 것인가. 노래 속에 잊힌 세월이, 그들의 모습과 추억이 되살아난다.


따르릉- .

따르릉- .

내 노래를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중단시키는 전화벨 소리. 어머니의「찔레꽃 붉게 피는」과「황성옛터」의 아버지, 그리고 영어 노래를 부르며 으스대던 큰언니와 찬송가를 부르던 근엄한 큰오빠와 작은 오빠의 <가고파>를 밀어내는 전화벨 소리에 나의 아침은 비로소 순서를 회복한다.


깍깍깍! 어디선가 까치가 운다.

명랑하고 반가운 소리. 그것은 또한 이제까지 내가 부른 노래에 대한 박수갈채 같은 것. 혹은 화답하는 소리 같은 것. 까치소리처럼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새 봄, 새 아침. 나의 미래가 동해의 일출처럼 눈부시고 장엄하다.

밀크로션을 바르는 화급한 손길에 또 다른 음 하나가 살아나고 나는 바바리코트를 걸쳐 입고 버스길로 내달린다.

‘시원한 아침 해가 솟아오면……’

긴 줄의 핸드백을 좌우로 흔들면서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일터로 달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