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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영희의 첫 수필집 <비오는 밤의 꽃다발>작품해설 /원형갑

능엄주 2017. 5. 6. 09:33

[작품해설]

변영희의 첫 수필집 <비오는 밤의 꽃다발> 또는

풀 한 포기의 마음

원형갑

(문학평론가 ․ 한성대학교 총장)

근년에 들어서면서 우리 문단에는 미묘한 기류가 일고 있다. 소설작가들이 시집을 출간하는가 하면 시인들이 장편소설을 써서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하고 시인 작가의 수필활동이 오히려 당연한 것처럼 상식화되어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런 현상은 70년대의 초까지만 해도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시인은 시인대로 오직 시만이 최고의 문학이요 예술이었고 그 밖의 장르는 잡문에 불과했었다. 소설작가 또한 그와 같은 장르적 우월감에 있어서는 시인에 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에 있어서 수필은 아예 문학이 될 수 없는 문학의 잡스러운 찌꺼기에 불과했었다.

신문이나 문학잡지에서도 수필은 한갓 취미삼아 읽어보는 휴식용 읽을 거리였지 정식 독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서울을 위시하여 여러 지방에서 수필인의 동호회와 협회 등이 생기고 마침내 수필 전문지가 월간으로 등장한 70년대 전반기는 차라리 수필의 문학 운동기였다고 기억할 지경이다.

그러나 수필은 이제 범국민적인 일상의 생활문학이 되어가고 있다. 문학이냐 아니냐. 따위의 장르다툼도 실없기 짝이 없는 옛말이 되어버렸거니와 서서히 장르의 붕괴시대가 들이닥치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려야 한다. 그런 점에서 생활화되고 있는 수필이야말로 문학의 자기탐닉주의를 탈피하고 있는 우리 시대의 문학현상일지 모른다.

변영희는 2년 전에 그녀의 첫 장편소설『마흔넷의 반란』을 써서 독서계에 돌풍을 일으킨 여류이다. 그 돌풍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첫 수필집을 묶어낸다. 그야말로 문학의 포스트모더니스트답게 기존의 문단적인 틀을 걷어차 버리고 스스로의 길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여류작가가 어떠한 선언문이나 새로운 주의 사상 같은 것을 내걸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미 이 여류는 그러한 자기언급 따위가 얼마나 실없는 일인가를 삶의 실체험을 통해서 몸으로 알고 있고, 또한 그러한 시대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에 있어서 수필은 역시 다른 모든 예술 활동과 마찬가지로 어디까지나 아방가르드적 모험이요 지적 퍼포먼스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영희는 성실하고 조심스러운 문학도이다. 나는「잡초와 화초」등 몇 편의 수필을 읽었지만 그의 첫 수필집이 그의 첫 장편소설처럼 그렇게 충동적인 반향을 일으키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수필에 있어서의 퍼포먼스라면 우선 대담한 자기고백이나 충격적인 폭로 전략이 예상 될 수밖에 없는데 내가 읽은 몇 편의 수필에서는 그런 것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여류작가의 수필에는 분명히 다른 수필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탈인간적(脫人間的)인 투시력 같은 것을 실감할 수 있다. 가령 부자의 나라 미국의 도시 보스턴 거리를 산책하면서 그 대공원의 훌륭한 잔디밭에 홀로 피어 있는 민들레꽃을 발견하고, 놀라는 눈이 그것인데, 작가는 그 당당하고 고고한 한 포기의 민들레를 통해서 생명의 진하고 강렬한 의지력을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어떤 들, 어떤 야산에도 지천으로 깔려 있어 이미 인간의 눈에는 버려진 풀일 수밖에 없는 그 민들레에게 작가인 변영희는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의 인격멸각성(人格滅却性, Depersonalization)을 체험하며 자연의 오묘한 생명력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훌륭한 대공원의 잔디밭에 날아와서 당당히 스스로의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는 한 포기의 민들레를 발견하고 황홀한 외경감을 누릴 수 있는 변영희의 인격멸각성이야말로 변영희 특유의 수필세계가 아닐까 생각해 보고 싶다.

그리하여 나는 변영희의 이 수필(「작은 풀 한포기」)을 잊을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인류의 문학세계에는 수없이 많은 의인법(擬人法)과 우화(偶話)들이 있지만 변영희의「작은 풀 한포기」처럼 또는「잡초와 화초」처럼 지천으로 깔려 있는 잡초 한 포기가 감동적 사고의 주체로 등장하는 일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 거의는 이솝이나 라퐁테느의 훼브르가 그러하듯이 여우나 닭, 곰이나 사자, 범 등 동물의 경우인 것이다. 때로 꽃이나 과실이 나올 때가 있지만 그런 것 역시 인간 문제를 이야기하기 위한 비유일 뿐이다.

그런데 공자의 시경(詩經) 국풍 속에는 어린 소년의 성(性)을 갈대나 다북쑥의 새싹으로 표현한 3, 4천 년 전 묘족(苗族)의 노래가 있어서 오늘날의 포스트모던들이 말하는 탈인간중심주의(脫人間中心主義)를 실감나게 한다. 3, 4천 년 전 중국 대륙의 묘족나라 임금은 사냥행차 때마다 새로운 어린 소녀 다섯 명씩을 공출하여 성(性) 노리개로 삼았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그 임금의 잔인한 성폭행을 평화적으로 고발하기위하여 민중들이 지어 부른 것이 이른바「추우(騶虞)」의 노래이다.

아무리 봄날의 들에 지천으로 깔려 있는 갈대나 다북쑥의 새싹처럼 천한 민초(民草)의 어린 소녀들이지만 그러나 그 파릇파릇한 새싹(性)이야말로 생물(동식물)을 아끼시고 보호하는 추우님께서 사랑하시는 생명이 아니냐고 호소와 애원이 뒤섞인 항의였을 것이다. 노래의 끝구마다 후렴처럼 ‘야야! 추우여’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추우는, 동물이든 식물이든 살아 있는 생명체인 이상 먹지도 않고 죽이지도 않은 상상적인 인수(仁獸)며. 성수(聖獸)이자 생명애의 상징이기도 한다. 비록 실재할 수 없는 동물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겠지만 그와 같이 신기한 성수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찬양할 수 있는 3, 4천 년 전 양자강(江水) 유역의 묘족문화가 얼마나 평화스럽고 생명애가 넘친 문화사회였던가를 실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생명애의 성수 추우는 공자 이래 오늘날까지 임금의 사냥을 돕는 활 잘 쏘는 관리의 대명사로 둔갑해 왔다. 생명애의 신이 정반대로 생명을 쏘아 죽이는 사람의 별명이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추우의 노래 또한 임금의 가혹한 성(性) 사냥을 저주하고 항변하는 노래가 아니라, 한 번의 화살로 그때마다 새로운 어린 암 멧돼지 다섯 마리씩 잡게 한다는 사냥관리인의 사냥솜씨를 예찬하는 노래가 되어버렸다. 물론 이러한 ‘추우’의 의미변화는 인간의 문화사가 얼마나 폭력적으로 변질되어 왔는가를 단적으로 말하여 준다. 3, 4천 년간에 걸친 인간의 사물인식의 역사가 그만큼 심각하게 악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동양에 있어서의 인식사적(認識史的) 악화는 바로 오늘날 서구에서 비로소 일고 있는 플라톤 이래의 이성주의(理性主義)에 대한 반성(안티로고스)과 맞물리는 문제라고 할 수도 있다.

마침내 서구의 문학과 사회학 등 인문사상은 이성적 사고의 포악성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의 흐름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 문학 장르의 붕괴현상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문학 장르의 붕괴란 무엇인가? 시가 시이기를 거부하고 소설이 소설이기를 거부할 때 필경 그것은 수필적인 흐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중요한 것은 ‘추우’의 놀라운 기법이다. 어린 다섯 명씩의, 소녀의 성을 갈대의 새싹, 다북쑥의 새싹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지천으로 깔려 있는 것이 갈대요 다북쑥이지만 그 파릇파릇한 새싹은 역시 그 스스로의 생명력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천한 집 어린 딸들의 성이지만 그녀들의 성은 어디까지나 그녀들의 성적(性的) 자유의지(自由意志)로 행복이 선택되어야 한다는 성의 자유권이 주장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시경 속의 ‘추우’는 변영희의 민들레와 뜻을 같이 한다고 생각된다. 대지의 어딘가에서 바람을 타고 날아와 보스턴의 어떤 공원 잔디밭에 뿌리를 내린 고독한 작은 민들레가 제 힘껏 꽃을 피우고 생명력을 과시하며 삶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3, 4천 년 전 묘족들이 예찬해 마지않았던 그 추우의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작가인 변영희는 어딘가에서 잡초와 화초를 구분하여 부르고 있는 것도 결국 사람의 짓이 아니냐고 꾸짖고 있다. 잘못되기 쉬운 인간의 역사적인 인식능력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변영희의 수필이 그 잡초 속의 한 포기 민들레였으면 한다. 꽃피고 시들면 또 어딘가로 멀리멀리 날아가는 그 민들레의 무한한 생명의 의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