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한시(漢詩)를 읽으며

능엄주 2017. 4. 4. 07:21

한시(漢詩)를 읽으며

부천지자만물지역려(夫天地者萬物之逆旅)

광음자백대지과객(光陰者百代之過客)

이부생약몽위환기하(而浮生若夢爲歡幾何)?

대저 천지라는 것은 만물의 여관이다

시간이라는 것은 백대의 나그네이다

뜬구름과 같은 인생 꿈과 같으니 즐거움으로 누리는 바가 얼마나 되겠느냐?


위의 시는 이백(李白)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의 앞부분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백이 형제, 친족과 함께 어느 봄날 밤에 도리(桃李)가 만발한 정원에서 잔치를 열고 그가 느낀 감상을 적은 글이다. 이백은 가히 시선(詩仙)이라 이를 만큼 천재적 재능을 지닌 당(唐)나라 시인으로, 이 시에서 천지는 모든 만물이 잠깐 와서 머물다 가는 곳이라는 비유가 탁월하다.

사람은 가도 천지는 유구하고 말이 없다. 삶이 적막할 때 문득 시 한 수를 읊다보면 화롯불에서 군밤이 튀듯이 어느덧 마음은 활기를 되찾는다. 더구나 이백의 타고난 호탕함과 자유분방함과 만나면 사는 일이 그다지 근심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결려재인경 이무사거마훤(結廬在人境 而無事車馬喧) 

문군하능이 심원지자편(問君何能爾 心遠地自偏)

채국동리하 유연견남산(采菊東籬下 悠然見南山)

산기일석가 비조상여환(山氣日夕佳 飛鳥相與還)

차중유진의 욕변이망언(此中有眞意 欲辨已亡言) 

  

농막을 지어 사람들이 사는 곳에 살아도 차마의 시끄러움이 없다

그대에게 묻노니 어찌 그럴 수 있느뇨, 마음이 멀어지니 사는 곳도 한적하다

국화를 동쪽 울타리 아래서 캐다가 유연히 남산을 바라본다

산 기운은 해 저물 무렵 아름답고 나는 새도 서로 더불어 돌아온다

이 가운데 참된 뜻이 있는데 표현하고자 하나 이미 말을 잃었다.


<귀거래사>로 유명한 도연명의 <음주기오(飮酒其五)>이다. 그는 인격이 고매하고 자연을 사랑했으며 독서를 좋아하고 세속의 영리를 멀리했다. 집 앞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어 스스로 오류선생이라 불렀으며, 중국 최고의 자연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시의 넷째 연에서 자연과 동화된 시인의 모습이 쉽게 연상 된다. 해질 무렵의 아름다운 산과 둥지로 돌아오는 새들에게서 우리는 평화로움과 안정을 느낄 수 있다.


소소낙엽성 착인위소우(蕭蕭落葉聲 錯認爲疎雨)

호승출문간 월괘계남수(呼僧出門看 月掛溪南樹) 

 

쓸쓸하게 잎 떨어지는 소리가 성근 빗소리로 착각하게 된다

승을 불러서 함께 문을 나가보니 달이 시내 남쪽 나무에 걸려 있다.


정철의 <야우(夜雨)>는 깊은 산사에서 지은 시다. 달은 밝고 창밖에 낙엽 지는 소리에 잠을 이룰 수 없어 승을 불러 밖에 나와 보니 시냇물 남쪽 나무에 달빛이 환하게 걸려 있다. 달빛 어우러진 깊은 산사의 가을이 낙엽 지는 소리와 함께 눈에 보이는 듯하다.


청강일곡포촌류(淸江一曲抱村流)

장하강촌사사유(長夏江村事事幽)

자거자래양상연(自去自來梁上燕)

상친상근수중구(相親相近水中鷗)

노처화지위기국(老妻畵紙爲棋局)

치자고침작조구(稚子敲針作釣鉤)

다병소수유약물(多病所須唯藥物)

미구차외경하구(微軀此外更何求) 

 

맑은 강물 한 굽이 마을을 감싸고 흐르니

긴 여름 강 가 마을에는 모든 일이 한가하다

스스로 가고 오는 것은 들보 위의 제비요

서로 친애하고 가까이하는 것은 물속의 갈매기이다

늙은 처는 종이에 바둑판을 그려 만들고

어린아이는 바늘 두드려 낚시 바늘을 만든다

병이 많은 몸에 필요한 것은 오직 약물

이밖에 또 무엇을 구하랴.


두보의 <강촌(江村)>을 읽으면 한여름 강가 마을의 풍경이 떠오른다. 바둑판을 그리는 늙은 아내와 낚싯바늘을 두드려 만드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한가롭고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게 비친다. 말년에 폐병을 앓은 두보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약물뿐, 세속적인 다른 욕망은 일체 없어 보인다.

중국의 고전시 중 가장 시율이 엄격한 율시가 두보에 의해서 그 면모를 갖추고 고전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몇 편의 시를 읊조리는 동안 나는 잠시 마음의 상처, 몸의 아픔에서 얼마간 자유로워짐을 의식한다. 삶의 여유라는 것은 타고나는 것인가, 습득하는 것인가, 서서히 찾아오는 것인가.


배반당해 속이 상할 때, 멸시받고 울적할 때, 다 떠나고 외로운 때는 모름지기 시를 읽을 일이다. 현대시도 좋지만 시어 한자 한자 속에 깊고 오묘한 의미가 응축된 한시를 읽으면 사바세계의 온갖 시름을 잊게 된다. 내 얼굴엔 드물게 잔잔한 미소가 피어나고 풍요롭고 윤택한 마음이 된다. 더구나 눈비가 사납게 흩뿌리는 밤에. 나직한 목소리로 고시를 읽노라면 이백과 두보가 기꺼이 내 처소에 찾아든다. 달 밝은 밤이면 그 나름대로 운치가 있고, 낙엽 지는 가을은 가을만의 멋이 깃든다.

한시를 읽으며 한자의 중요함을, 한자가 우리 문화에 끼친 지대한 영향을 새삼 깨닫는다.

앞으로 시간이 허락하는 한, 나는 한시를 읽어 내 마음 밭을 비옥하게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