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를 찾아서
치과에 올라가서 치료를 받고 내려오기까지는 한 시간 남짓 걸린다.
그동안 햇볕은 치과 옆 호프집의 기다란 간판과 약국의 유리문까지 따스한 빛깔로 가득 채워놓았다.
9월에서 10월에 이르는 사이 가을은 들판의 모든 살아 있는 것들과 함께 영글어서 풍성, 포만, 은택 같은 낱말들을 떠올리며 자연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게 하였다.
딸애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어머니교실 모임에 가려고 서둘러 점심을 먹던 중 으지직! 하고 돌을 씹었고 앞니가 깨어졌다.
당시엔 통증이 없고 별다른 불편도 없어서 무심하게 지냈더니 근 십년이 다 돼가는 이즈음에 와서 그 치아에 이상이 생겼다.
그렇지 않아도 환절기를 앓는 나는 욱신욱신 치아까지 쑤시니 밤마다 내 침상 곁에서 염라대왕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서너 번 다니면 끝나겠지 하고 간단하게 생각한 것이 치과에 환자가 밀리고, 내 볼일 때문에 의사가 지정해준 날짜를 몇 번 어기다보니 아직도 치과 출입이 계속되고 있다. 갈아내고 씌우는 작업이라는데 쇄- 하는 금속성 소리를 들을 때면 골머리가 딱딱 아파지고 치과로부터 도망치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끼게 된다. 병원 중에 산부인과가 제일 질색이었는데 치과에 비하면 산부인과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국소마취당한 채 입을 최대한으로 벌리고 누운 상태에서 쇄- 하는 금속성 소리를 듣는 일은 지옥에서 치르는 일 단계 형벌처럼 여겨졌다.
흩뿌려지는 물의 감촉은 뱀의 혀처럼 섬뜩하고, 침샘에 고이는 침을 흡수하는 기계가 입안을 휘저을 때는 가시 달린 벌레를 입에 문 듯 몸서리가 쳐진다. 마취가 풀리지 않은 채 울상을 지으며 치과를 나오다가 나는 한 거지를 만났다. 내가 치과에 올라갈 때와 마찬가지로 햇볕 가운데 웅크리고 앉은 남자거지.
“백 원만 주세요.”
“백 원 가지고 뭐 하시게요.”
“음료수 사먹게요.”
음료수라고 말하는 걸 보니 상무식 꾼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천 원짜리 한 장을 주었고 남자거지는 고맙다고 머리를 주억거리면서 나에게 복 받을 사람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 남자거지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하면서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다.
거지의 눈가엔 가을 햇볕이 소복하게 고여 있었고 그것은 이슬방울이 되어 반짝였다. 거지의 눈물을 보자 나도 그만 눈물이 쏟아져서 도망치듯 지하철역으로 달려갔다. 바로 추석 전날의 일이다.
“엄마, 송편은 무슨 송편. 우리만 잘 먹을 거야? 엄만 짠돌이야. 배추 이파리 한 장 주고 오지 그랬어.”
아들과 딸의 성화에 시장보따리를 내던지고 다시 치과로 달려갔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 자리에 남자거지는 보이지 않았다.
해가 설핏한 시간. 하얗고 둥근 달이 성급하게 계림극장 쪽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고향으로 떠나는 사람들을 위한 명절인 듯 거리에 차량들만 질주했다.
치과에 갈 때마다 이번엔 나타나겠지, 오늘은 만나지겠지, 하는 기대가 허물어지자 을지로 6가 파출소에도 두어 차례 방문했다.
경찰관은 나에게 남자거지의 인상착의와 성명, 나이를 물었다. 그들은 별난 아줌마의 출현을 흥미 있어 할 뿐, 내가 만난 남자거지에 대해서 나보다 더 아는 것이 없었다.
치과에서 겪은 고통 때문에 굳어진 표정으로 중부시장으로 올라가다가 나는 난데없이 ‘제비’를 만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누나, 무슨 일인지 말씀만 하세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제법 곱상하게 생긴 젊은이가 내 뒤를 열심히 따라왔다.
내 얼굴은 그때 소박맞은 새댁처럼 애수를 띠었나. 청승과 냉기를 풀잎처럼 세운 형상이었나. 어이없고 하도 기가 차서 나는 남자거지 찾기를 단념하고 총총히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을이 깊어갈수록 그 거지에게 배추 이파리 한 장 선뜻 내주지 못한 나의 후천성 구두쇠 기질을 혐오했고 후회를 거듭하였다.
인생은 누구나 거지라던 스님의 말씀을 상기했다. 한 잔의 음료수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못한 것을 얻기 위해 사무실에 앉아 있는 나의 실체도 역시 거지라는 사실을 수긍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적어도 그 거지는 동정 받을 자격이 있다고나 할까요. 염치를 아는 거지였어요. 다른 많은 거지들과는 구별이 되었어요.”
거지를 찾는 이유를 묻는 경찰관에게 나는 분명하게 말했다. 자신도 거지 중의 한 사람이라는 걸 자각하지 못한 미남 경찰관이 ‘아줌마 꿈 깨세요.’하는 듯이 빙글빙글 웃었다. 그 남자거지를 찾지 못하는 한 00년 가을이 내게는 울적하고 슬픈 가을일 수밖에 없는 것을 미남 경찰관이 알 턱이 없다.
까만 손톱과 벗겨진 피부, 남루한 행색에도 불구하고 고수머리와 얼굴 윤곽이 절대로 천골로는 보이지 않는 그 남자거지는 어디로 왜 갔는가.
사십도 안 돼 보이는 그의 젊음이 애처롭고 음료수 값을 구걸하는 그의 곤궁에 목이 멘다. 춥고 가난한 거지같은 마음, 간절한 마음으로 나는 오늘도 추석 전날 만난 남자거지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