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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네티컷으로의 여행/변영희

능엄주 2017. 2. 19. 04:02

코네티컷으로의 여행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또 갈아타고 하면서 버스터미널에 도착한다. 1시간이나 여유가 있었지만 초행인 나는 15게이트에 미리 대기한다.

한국에서 낯모르는 곳으로의 여행도 힘든데, 생판 모르는 뉴욕에서랴. 아무튼 큰 공부가 될 것 같다. 그런데 왜 머리가 아프지? 긴장 탓인가. 과로인가. 여독이 어느 정도인지는 한국에 돌아가 보아야 측정이 가능할 듯하다.

출발 30분 전, 20분 전, 10분 전……, 5분, 3분……. 완만하고 여유 있는 뒷대머리의 기사 아저씨를 보며 내 마음은 다소 편안해진다.


14시 15분. 마침내 DANBURY행 보난자 버스 출발한다.

460west  41street의 지저분한 거리를 통과할 때 옆에 앉은 여자가 나에게 무슨 말인지 자꾸 묻는다.

좀 긴 듯한 지하터널을 지나 뉴욕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고가도로로 진입한다.

뉴욕은 결코 겉모습처럼 아름다운 환상의 도시만은 아니라나. 글쎄 나도 그런 느낌이 들기는 한다. 파란 하늘, 높은 구름, 눈이 미치는 곳마다 울창한 숲, 갈대 우거진 연못, 우리나라의 미루나무와 비슷한 나무들. 한국으로 말하면 지금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는 것인가.


저쪽 뒷자리에 눈 감고 있는 남자 인상이 고약하다. 어머! 흑인도 많이 탔다.

《황홀한 외출》의 작가 변영희 공포의 외출인가. 이건, 조금 불안하구나.

달리는 보난자 버스 앞을 겁 없이 날아가는 미국 비둘기들. 비둘기들은 언제 철이 들까.

이게 허드슨 강이냐. 대서양 바다냐. 누구한테 물어 볼 수가 있어야지.


허드슨 파크웨이로 진입. 그림 같은 풍경. 꽤 괜찮은 곳을 지나간다. 왼쪽의 저 건물은 학교인가. 도서관인가? 나그네의 궁금증은 끝도 없어라.

덴버리까지만 말고, 더 멀리 더 오래 달렸으면. 가고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행복한 일이다.

잔디밭에 웬 쓰레기야? 미국의 난지도인가? 어딘지는 모르지만 지저분한 곳이군. 다시 끝없는 숲, 숲을 달린다.

여기가 시골인가. 집모양이 별로 근사하지가 않아. 분위기는 있어 보이지만.


옆 좌석의 여자는 어째서 나에게 그처럼 할 말이 많은 것인가. 나를 언제 만났다고.

혜자가 처음 미국에 이민 와서 익스큐즈미 하나로 버텼다더니.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아, 고단해. 옆의 여자가 나를 고단하게 해. 내가 유식하게 생겨가지고 속속들이 무식한 사정을 모르는 모양인가.


가도 가도 끝없는 초원. 초원도 풍성한 나라군. 푸근하고 싱그럽다. 그런데 나는 피곤하다.

어제 비 오는 날 센트럴 파크 조깅코스를 한없이 걸은 탓이리라. 피곤한 이유는 정욱이와 그 먼 길을 나무 향기에 취해서 끝없이 걸었으니.

여기는 꼭 무악재같이 생겼네. 무악재 너머로 돛단배 같은 구름송이들. 검푸른 숲으로 나아가는 덴버리행 그레이하운드.

이건 또 무슨 파크인가. 어쩌면 미국이란 나라는 파크가 이리 많으냐. 거리 전체가 파크 같은데.

저건 등꽃이냐, 라일락이냐. 한국의 오동나무 같기도. 깎아지른 바위산. 여러 갈래로 흩어지는 길, 길. 오는 길, 가는 길.

초행길이어서 먼 느낌, 아득한 느낌. 내릴 때 뒷대머리 운전기사에게 Thank you! 해야지.


와! 클로버꽃이다. 한국의 것보다 훨씬 커 보이는 왕클로버꽃.

노란 냉이꽃도 지천이다. 그리고 주변의 백색, 비둘기색, 회색으로 컬러가 단조로운 시골 주택들. 제법 운치가 있네.

내 앞의 노신사는 대학교수인가. 흔들리는 버스에서 계속 두꺼운 책만 읽고 계시네. 기특하신 모습 반가워라. 만약에 그가 나에게 내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내 두 귀로 억지로 알아듣고 코리아에서 온 에세이스트라고 말해 주어야지. 당당하게, 자랑스럽게. 변영희 여러 가지로 웃기고 있다. 기분 좋은 상상만 연속하지 말것. 미국이라고 좋은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니까.


저 하얀 꽃은 들장미인가. 산찔레인가.청순하게 빛나는 저 흰 빛. 푸름 속에 더욱 돋보인다.

나무도 연녹색, 더 푸른 것. 검은색 혹은 흰색, 갈색을 띤 것 등, 가지각색이다. 마치 뉴욕거리의 인종이 가지각색이듯이.

덴버리 1마일, 거의 다 왔구나. 내 공포의 여행이 끝나가고 있구나.

 콜록콜록, 기침을 자주 하는 사람 좋아 보이는 운전기사 아저씨. 기침을 할 때마다 덜컹덜컹 흔들리는 버스.


덴버리에 도착했다.

 DANBURY!

운전기사 아저씨가 나에게 외친다. 덴버리에 다 왔다. 코리언 아줌마야!  내려라! 하는 듯이.

나는 생큐! 하고 짧게 인사했다.


분홍색 T셔츠를 입은 혜자가 씩씩하고 활기에 넘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혜자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혜자의 빨간 차 올즈모빌에 옮겨 타고 코네티컷으로 달린다. 역시 아름다운 길. 더구우드가 사춘기 소녀의 꿈처럼 만발한 길을 혜자의 멋진 차가 경쾌하게 질주한다.  끝없는 푸른 숲 속으로의 여행. 깊이와 넓이를 가늠할 수 없는 광활한 대자연의 퍼레이드.

감탄 또 감탄하며 산장 같은 코네티컷의 혜자 네 대저택에 다다른다. 역시 숲으로 둘러싸인.


차에서 내리자 제일 먼저, 진한 나무향기가 나를 맞이한다. 사람보다 큰 검둥이 Bo가 달려들어 내 손을 핥는다.

아악! 하고 비명을 지르는 한국 아줌마!  Bo의 환영인사라나. 혜자는 나에게 Bo의 등을 쓰다듬어 주란다. 어휴, 겁나.

몸에 경련이 일도록 아름답게 손질한 잔디밭, 미끈하게 잘 자란 영양 좋은 나무들. 어느 틈엔가 내 마음도 푸른 잔디밭이거나 미끈하게 잘 자란 나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