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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구마의 환상

능엄주 2016. 11. 6. 22:11
 물고구마의 환상
  글쓴이 : 변영희날짜 : 09-09-07 22:29     조회 : 1545    
"  몇 C C 뽑는 겁니까? "
다른 날에 비해 시간이 좀 걸리는 듯하여 앞에 앉은 닥터에게 물었다. 그리고 주먹 쥔 손을 풀어도 좋으냐고 질문했다. 한참이나 주먹을 꼭 쥐고 있노라니  손 뿐만 아니라 어깨에도 힘이 들어갔다.

"어깨 힘 빼세요."
젊은 의사가 말했다. 혈관이 얼른 안나오는 모양인지 주사기로 팔 가운데를 찌르다가 손등을 찔렀다. 그가 나의  왼손 오른손에  번갈아 주사기를 대고 찌르기를 반복하는 동안 나는 내 아들 또래보다  어려 보이는 닥터의 가슴에 단 명찰을 쳐다보았다. 주사바늘이 닿았던  부위는 이내 발갛거나 푸르게 변해가고 있었는데 결국은 서너 차례 찔렀다 뺐다를 반복하고서야  목표량을 채혈하였다.

"주먹을 펴고 싶으세요? 혈관이 안좋아서....."
눈깜짝할 사이에 이보다 훨씬 굵은 주사기에 채혈하던 간호사들도 있던데 무슨 혈관 타령이람. 엊저녁부터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경기도에서 서울특별시 00대학병원까지 오느라 지쳐 있던 나는 은근히 짜증이 났다.
전에 입원했던 S 병원에서도 Y 병원에서도 양쪽 팔은 말할 것도  없고 손등에 혹은 발등에 찌르다가 다른 간호사가 호출되어 오는 일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따끔하는 순간 주사기에 검사용 혈액이 가득 채위지곤 했다.

" 0 CC 입니다."
닥터는 피 뽑은 부분에 거즈를 대고 반창고를 붙여 준 후  5분 정도 꼭 누르고 있으라고 했다.
잔뜩 흐린 하늘에선 곧 비가 내릴 듯 무더웠고 나는 목이 탔다. 피뽑는 날은 괜히 투정부리는 기분이 된다. 맨날 이 노릇만 계속할 것이냐. 병원 말고 더좀 신나는 장소를 다녀라. 바보야! 

나는 졈퍼를 걸쳐입고 채혈실을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배가 출출해지기 시작하면서 문득 집에 있는 찐고구마 생각이 났다. 호박고구마의 포삭한 맛은 비가 부슬거리는 날 제격 아닌가. 나는 위장이 허한 채로  지하철에 올랐다. 

호박고구마  같은 유전자 변형의 신품종 보다 더 달고 찰진 물고구마 맛을 떠올렸다. 고구마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었던 것은 6. 25후의 C교도소 앞 마당에서였던 것 같다. 본시 나는 엿이니 고구마, 곶감 같은 단음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단맛보다는 신맛, 이를테면 석류나 홍옥사과같은 눈이 감길 정도의 지독한 신 맛을 선호하는 편이다.

C교도소 앞 마당에서 죄수들을 면회온 가족들과  함께  먹던 물고구마의 맛은 고향의 맛이었고, 부모님의 맛, 형님과 형수, 이모, 조카의 맛이었다고나 할까. 나는 여고생인 친척 언니와 그들이 왜 교도소 생활을 해야하는지 헤아리지 못했으나 둥그렇게 펼쳐놓고 주거니 받거니 나누어 먹던 음식 종류들, 그 중에서도 평소에는 입에 대지도 않던 물고구마  맛은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우리집의 냉장고에 있는 조작된 듯한 호박고구마 맛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나는 물고구마 추억에 젖어  아즈라히 먼 과거로 치달리고 있었다. 물론 시장끼도 잊었으며 피를 뽑을 때 나자신에게 화가 났던 사실도 잊었다. 당시 친척 언니의 설움이, 억울함이, 황당 비참함 등이 어느 정도였는지, 주말 행사처럼 싸구려 붕어빵 봉지를 쳐들고 그 언니네 집을 방문하던 C중학교 체육교사인 미남자 K씨는 어떤 인물인지  여전히 수수께끼인 채 다만 물고구마의 환상을 안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물고구마의 진한 단맛처럼 나의 잠은 매우 달콤했다.

이희순  09-09-08 17:50
마땅히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던 일들도 물고구마 오후의 포만감으로 바라보면  아슬한 추억을 불러모아 어느덧 행복한 졸음으로 바뀌는가봅니다. 물고구마는  멍든 팔을 어루만지며 선생님 품안에서 깊이 잠들었군요. ^^  "젊은 양반, 어깨에 힘 빼세요."
     
변영희  09-09-09 09:25
담쟁이

백척간두 위에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듯
벽을 뛰어넘기 위해 달려드는 담쟁이 덩쿨

사랑이여 너는 멈출 줄 모르는 도전이다
낙락장송도 절벽도 허공도 타고 오르는
사랑이여 너는 포기할 줄 모르는 끈기이다
허허로운 벽의 가슴과 팔다리를
핥고 빠는 몰입의 매력!

은산철벽 앞에서도 마지막 관문을 뚫기 위해
또렷하고 고요하게 화두를 들고 오롯이 나아가는 한 수좌

                                                    고영섭 시집에서

이희순 선생님께 감사함을 대신합니다.
박원명화  09-09-09 07:43
건강만큼 소중한 게 없는것 같습니다.
작은 검진이라도 받으러 병원에 가서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도 나 자신이 왜 그리 작아 보이는지, 가끔은 속이 상하기도 하고 울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은 나무가 어디 있겠습니까. 맛 있는 호박고구마 생각을 하며 잊으셨다니, 역시 작가만이 가질 수 있는 기막힌 몽상덕에 아픔을 씻어 버린 것이지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변영희  09-09-09 09:48
그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류시화 시집에서

멋진 가을 보내시기 빕니다.
일만성철용  09-09-09 10:22
멋진 소설의 한 장면을 보는 기분입니다. 막힘없이 술술 읽게 되는 것이.
"그 무서운 질병의 고개를 넘어 고희를 술을 탐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하면서 보내는 요즈음입니다. 나이를 먹으니 몸이 마음을 부리네요.
     
변영희  09-09-09 13:30
선생님 글을 읽으면 절로 고개를 숙입니다. 정말 큰 선생님이다!  감탄의 연발입니다.
감히, 함부로, 쉽게 말을 할 수 없는 심정이지요.
행복한 노년을 보내시는 것도 존경스럽고  우리 모두 성철용 선생님만 같아라 이지요.
좋은 날 아름다운 날. 감사합니다.
이진화  09-09-09 16:16
변영희 선생님, 안녕하세요.
병원 다녀오시고 별 일 없으시겠지요.
요샌 전부 밤고구마, 호박고구마는 흔해도 물고구마가 드물더군요.

'물고구마의 진한 단맛처럼 나의 잠은 매우 달콤했다. '
단잠과 물고구마를 함께 맛보았습니다.
     
변영희  09-09-09 20:44
가을 밤에 홀로 앉아

獨坐悲雙빈      홀로 앉아 늙어감을 슬퍼하노라니
空堂欲二更      텅 빈 방에 二更이 되려 한다
雨中山果落      빗 속에 과일 떨어지고
燈下草蟲鳴      등불 아래 풀벌레가 우네
白髮終難變      흰 머리는 끝내 검은 머리 되기 어렵고
黃金不可成      쇠는 황금이 될 수 없으니
欲知除老病      늙음과 병을 없애는 법을 알고 싶어
唯有學無生      오직 無生을 배운다

                                    盛唐시대 王維의 [秋夜獨坐]

 인간의 삶 속에서 생노병사를 극복할 수 있다면....
이진화 선생님의 애정어린 댓글 무지 감사합니다.
임병식  09-09-09 18:14
변영희선생님, 빨리 쾌차하시길 빕니다.
전에도 어깨가 아프신 걸로 아는데, 별일없으시길 빕니다.
물고구마는 전에 해남이 유명했는데, 지금은 거의 밤고구마를 심고
물고구마는 안보이더군요.
저도 물고구마를 좋아합니다.
쪄서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고 먹으면 아주 끌맛이지요.
     
변영희  09-09-09 20:54
오래된 얘긴데요. 소설가 어떤 분이 절보고 어깨에 뭐?가 있다고 푸닥거리 해야 낫는대요. 그럴 만큼 아프다는 거죠. 아픈 게 어디 어깨뿐이겠습니까.
오늘이 생애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살아요. 매일 아침 기적을 체험하고 있지요. 죽도록 아프다가  다시 눈 뜬 게 희한하거든요.
임병식 회장님도 뵙고 가을경치도 즐길 수 있도록 작가회의 가을 세미나 다른 데와 겹치지 않게 날자 정해주셨으면 합니다. 
     
물고구마 먹고 싶은 저녁
임재문  09-09-10 00:43
저도 전남 해남 산이라서 해남 물감자라고나 할까요? 고구마는 감자라 불렀고, 감자는 북감자라 불렀던 전라도 사투리 ㅎㅎㅎ 그래도 해남 물감자가 정겹기만 합니다. 지금은 해남 물고구마라 개명해야 하겠네요. 변영희 선생님!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자주 자주 뵈올 수 있는 축제 마련하고 싶어지네요 ㅎㅎㅎㅎㅎ
     
변영희  09-09-10 20:14
"삶에 절망해 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의 진수를 알 수 없다.
참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마음 속에 고통과 슬픔, 그리고 좌절과 절망이
젓갈처럼 삭아서 맛이 들 때 참다운 면목을 깨달을 수 있다."
                                                                                [寂滅의 즐거움] 에서

우리는 지금 새우젓일까 곰삭은 멸치젓 아니면 칼치젓일까.
대체 무엇일까. 어디까지 이르렀나.
제 글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건강하십시오.
박영보  09-09-10 03:07
그게 물고구마이던 밤고구마이던 고구마라는 말에서 고향을 느끼게 됩니다. 이곳에서는 Yam이라는 종류가 있는데 속은 주황색이고 당도가 높습니다. 추수감사절에 칠면조 요리와 함께 내 놓으면 격에 맞지요. 한국 마켓에 가면 한국의 고구마도 있지만 변종인지 표면이 울퉁불퉁 못생겼고 한국에서 대하던 것과는 다르군요. 그런데 <호박고구마>라는 말은 처음 들어봅니다.
모양새가 호박 같은지, 맛이 호박같은지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만 변영희 선생님의 글에서 고향의 냄새나 체온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
     
변영희  09-09-10 20:39
"사랑하는 사람아
마음을 활짝 열어 보아라
바람이 마음껏 너의 존재를 통과하도록
너의 모든 생각을 쓸고 가도록
바람에게 모든 것을 허용해 보아라
그리하여 마침내 바람마저 통과하는
바람보다 더 자유로운 존재가 되어 보아라
그리고 그렇게 너는
바람의 전설이 될 것이다 "
                                                          게이트의 [깨달음의 연금술]에서
박영보 선생님
발명의 시대 창조의 시대가 되어서인지  밤고구마, 물고구마는 어릴 때부터 익히 알고 있었고요. 근래엔 호박고구마라 해서 물 한 방을도 안넣고 익히는 솥까지 등장했습니다. 모양은 거의 비슷한데 속이 노랐습니다. 그래도 어린 시절 먹던 먹거리들이 더 나은 것 같아요.
정진철  09-09-11 10:08
변영희 선생님 저도 주기적으로 (심심하면 ㅎ) 한번씩 피를 뽑는데 살이 통통하게 쪄서 핏줄이 안보입니다. 그게 노련한 간호사한테 걸리면 쉽게 핏줄을 찾아내던데 신삥이한테 걸리면 간호사든 의사든 어찌나 이리저리 찔러대던지 고역이 아닐수 없는데 변 선생님이 그 고통을 당하셨군요~ 고구마 많이 잡수시고 아무쪼록 건강하세요~~
     
변영희  09-09-12 22:18
정진철 선생님의 글 읽으면  유쾌해집니다.
웃음꽃이 피어나고 그냥 흐뭇했습니다.
그런데도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그 무엇을 느낍니다.
그것은 선생님의 우람한 체격에 압도당해서 인 것 같지 않은가요?ㅎㅎㅎ.
물고구마 사러 경동시장으로 나들이 가야겠습니다.건강을 위하여
감사합니다.
김종선  09-09-12 18:53
변영희 님,
여기서 뵙네요. 참 오랜만이에요. 이곳 홈피에도 자주 얼굴 내밀지 않았으니 통 소식을 몰랐지요. 그런데  어디 아파요? 병원간 얘기라, 하기야 병원 안 가는 사람 있겠어요? 이제 세월 좀 살은 사람들은 <건강제일주의> 지내야 하나봐요. 서늘한 가을과 함께 더욱 건강하기를 .....
     
변영희  09-09-12 22:25
안녕하세요?
김종선 선생님 오랫만에 뵙는군요.
키는 커갖고 맨날 병원에 돈갖다 줍니다.
어릴 때도 하도 병치레가 잦아서 양딸로 팔려갈 뻔했다지 뭡니까.
그랬으면 저는 부산에서 성장했을거라는군요.
병체질은 아닌데 어쩌다 병원 가는 게 일상이 되었는지 원.
건강해야 걸작도 남길 텐데 말입니다. 반갑습니다 고맙습니다.
최복희  09-09-18 11:31
어디를 가셔도 무엇을 봐도 창작으로 연결시키시는 선생님의
글 솜씨가 놀랍습니다.
요즘 건강은 어떠신지요.
행복한 삶으로 좋은 글 많이 쓰시길 기원합니다.
     
변영희  09-09-20 09:14
'바람에게 길을 묻다' 의 작가와도 새롭게 만나고 이씨조선의 마지막 황손도 뵙고 함께 사진도 찍으며 즐거운 가을 나들이.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다 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 보람있는 전주 여행을 마치고 오니 좋은 분이 다녀가신 흔적. 우리는 바람에게 묻지 않아도 직감으로 좋은 분 ,좋은 것들의 의미를 알게 되는군요. 최복희 선생님에게 감사와 기쁨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