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진 색경을 대야 물에 담그면 잠시 후 희한한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달밤에 펼쳐지는 행사는 피난민 아이들의 유일한 놀이였다.
태극 문양의 두 가지 색깔은 자주 범위가 변했다. 변화의 모습은 아이들에게 색다른 세계를 보여주었다.
빨강색 청색의 변화를 보고 두석이를 비롯한 어린이들은 전쟁의 현재상황과 집에 돌아갈 수 있는 희망을 짐작으로 알아낼 수가 있었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일에 일체 참견하지 않았다.
그들은 날만 새면 먹을 것 걱정이 태산이었다.
내일 죽음이 닥친다고 해도 우선은 보리죽이라도 맘껏 먹을 수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하연순 여사의 사촌 언니, 해명(海鳴)스님의 안내로 산골짜기 초가집에 우정식 씨가 출현했다.
한강 다리가 끊기자 그는 무작정 피난민 무리를 따라나섰다고 했다.
가다가 멈추고 걷다가 졸면서, 밤을 낮처럼 낮을 밤처럼 쉬지 않고 걸어서 천신만고 끝에 고향으로 내려왔다는 이야기였다.
그의 행색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거동을 못하는 하연순 여사의 불 건강과 실어증이었다.
우정식 씨야말로 식량 구하는 작업을 자유롭게 수행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느닷없이 방밖으로 뛰어나가 헛소리를 질러대는 하연순 여사를 지키고 있어야 했다.
이따금 해명 스님이 가져다주는 보리쌀 몇 되와 밀기울이 그들의 연명수단이 되었다.
해명 스님이 원능골에 다녀갈 때는 양식 뿐 아니라 이따금 C시의 소식이며 시국에 대해 전해주었다.
“머지않아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기다려 보십시다.”
우정식 씨는 아이들이 모여 앉은 뒤란으로 갔다.
뒤란은 더 적요하고 더 소슬한 바람이 불어왔다.
죽음 같은 긴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아버지!”
두석이가 대야 앞에서 큰 소리로 아버지를 반겼다.
아이들이 일제히 대야에서 물러나며 우정식 씨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아이들의 눈이 달빛을 받고 환하게 빛을 뿜었다.
“아버지! 청색이 훨씬 늘었잖아요. 보세요! 반을 넘었어요.”
대야 물에 잠긴 색경에는 청색이 면적을 넓혀가고 있었다.
적과 청의 대립구도가 확실하게 바뀐 모습이었다.
“그래? 청색이 뭔 데?”
“아저씨! 청색은 아군이예요! 우리 국군이 이기고 있어요!”
아이들이 신이 나서 외쳤다.
우정식 씨는 문득 해명 스님의 말이 떠올랐다.‘머지 않아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라는
“애들아! 그만 들어가 자거라. 밤바람이 제법 차구나.”
아이들은 하나 둘 제집을 찾아 들어갔다.
원주민들이 피난을 떠난 빈 집은 그들의 임시 거처요, 달밤의 행사를 은밀하게 진행할 수 있는 비밀의 성소이기도 했다.
대야 물에 달빛이 고요히 내려앉았다.
아이들이 자리를 떠난 후에도 빨강색은 점차 줄고 청색이 그 자리를 확보하고 있었다.
달빛이 물과 거울과 함께 이루어내는 양상은 그 시각 청색의 대길을 예고하고 있는 듯 했다.
댓돌 밑에서 처연히 울던 귀뚜라미 소리가 뚝 그쳐 있고, 숲을 흔드는 바람소리가 이따금 귓가를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