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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양 안개

능엄주 2016. 9. 24. 07:49

밤새 잠을 설쳤다.
 악양 깊은 산 정상에 위치한 암자와 전혀 생각지 못했던 기도 동참, 그리고 산골 암자에선 보기 드문 정갈한 이부자리. 또 있다.

옆에 잠들어 있는 친구의  코고는 소리가 우렁찬 이유였을까.

해맑은 기운 감지되면 몇 날이고 머물고 싶어 예정에 없이 귀가 일자까지 늦추면서 한 밤중 기도에 참석한 일이 내 감성을 들쑤신 것인가.

어쨋든 그런 모양새로 밤을 지새운 나는 먼동이 터오자 곧장 법당으로 갔다. 새벽 예불은 진작에 시작된 것 같았다.

<천수경>을 따라 읽는 중에 자꾸만 부우옇게 서리는 안개같은 것이 있었다. 몇 번이나 눈을 문질러 닦는 시늉을 했다.

다른 사람들과 같은 속도로 따라 읽는데 무리가 있어 나는 그냥 고요히 자리를 지켰다. 안개를 떠올리며.

추석이 다가오니 일단 집으로 가는 일이 시급했다.

회향일에 다시 오기로 작정하고 나는 비구니스님 차로 상신마을을 빠져나왔다.

집집마다 너른 마당에 큰 감나무가 있고 노랗게 잘 익은 감이 탐스러웠다. 알알이 영근 밤송이도 툭! 하고 저절로 땅바닥에 떨어졌다.

악양 읍내로 나오자 여기는 코스모스가 한창이었다.

키도 훌쩍 큰 것이 수다한 꽃송이를 달고 바람부는대로 하늘거렸다. 여유만만하고 평화로운 경치가 화개까지 이어졌다.

 하동군의 관과 민 합동으로 일궈낸 코스모스 물결인 듯 코스모스꽃 행렬은 새벽 안개를 병풍처럼 두르고 악양은 물론 화개와 반대 방향인 하동가는 길에도 길게 길게 연결되었다.

"보이시죠? 저 들판 가운데 피어오르는 안개?"
비구니스님이 내게 안개를 보라 하셨다.

안개는 논 가운데서 피어올라 긁은 선을 그리면서 낮게 마치 용이 춤추듯이 논 위를 감돌아 멀리 섬진강을 향하여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특이하네요"
정말 특이하고 별난 안개였다.

안개는 천천히 이동 중이었는데 그냥 위로만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2009년의 가을 수확을 축복해주듯이 낮게 엎드려 용이 지나가듯 위용있게,

기품있게 황금 들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또 오세요. 안개 말고 더 좋은 것도 많이 있어요."
비구니스님과 하직하고 나는 서울행 버스에 올랐다.

 밤잠을 못잔 탓인지 차에 오르자 긴장이 풀리면서 스르르 졸음이 밀려왔다.


스님께서는 어디쯤  가고 계실까. 아직도 악양 안개는 낮게 포복하며 들판을 포섭하고 있을까.

아니지 한 해 농사를 성공적으로 일궈낸 자연과 사람에 대한 위무慰撫라고 해야 하나.

밤안개, 겨울 안개, 물안개 등 안개는 수없이 보아왔지만  악양의 새벽 안개처럼 신기한 연출을 하는 꼭 무슨 살아있는 물체같은 안개는 처음보았다.
안개를 본 것이 아니라 용을 본 것 같기도 했다. 악양 안개에  몰입하는 사이 고속버스는 한국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  섬진강을 옆에 하고 속력을 내어 힘차게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