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낼 것 없어. 청오경(靑五經)은 겨우 875자 밖에 안 돼!”
교수님의 첫 말씀에 고무되어 풍수학 원론 첫 페이지를 펼쳤다. 교재는 펼쳤으되 다만 새까만 점의 집합으로만 보이는 제1장 청오경의 내용을 검토해 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무려 800 페이지에 달하는 두텁고 어려운 책이었으므로 교수님이 먼저 읽은 후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한 단락씩 읽었다. 원문에 한글 표기를 해놓았기 때문에 읽는 데는 아무런 불편이 없었고, 번역도 명쾌하여 문장의 수려함에 감탄하였다. 풍수학 고전이 아니라 마치 문학 강의를 듣는 것처럼 조금씩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더구나 청오경의 저자에 대해 신선(神仙) 혹은 선인(仙人)이라는 다소 믿기 어려운 설명을 읽고는 전설의 고향에 찾아가듯 신묘(神妙)한 분위기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강의실은 긴장과 호기심으로 가득하게 되었고 또는 새로운 학문에 대한 탐구심과 의욕으로 불타는 듯하였다.
청오경은 묘지(墓地)를 쓰는 방법인 장법(葬法)과 관련한 최초의 이론서로서 일명 지리서로 불리기도 하는데, 지금으로부터 약 2천 년 전 중국 후한시대에 음양이치에 통달했던 청오자가 지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당시 조상의 묘지가 후손에게 영향을 준다고 신봉한 조상숭배사상은 한국의 고대 부족사회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고, 부여에서는 영혼불멸 사상을 믿었기 때문에 조상의 장례식을 후하게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총 875자의 단문으로 구성되어 있는 청오경은 편(篇)이나 장절(章節)의 구분이 사자일구(四字一句)의 한 문장으로 연속되어 있고, 조선 지리과의 과거시험에서 4대 필수과목 중 하나였다고 한다.
산욕기영(山欲其迎) 산은 나아가서 맞이하려 하고
수욕지정(水欲其澄) 물은 안정되어 맑아지려 함이다
산래수회(山來水回) 산이 앞으로 나아가서 다가들고
물이 앞으로 나아가서 다시 돌아들게 되면
핍귀풍재(逼貴豊財) 귀함이 더욱 가까이 오게 되고 재물도 풍족해 질 것이다
이 대목에 이르러 나의 마음은 느닷없이 강의실과 교수님, 육중한 교재와 동학들의 곁을 떠나 KTX 를 타고, 혹은 비행기로 아니, 바람과 구름에 실려 멀리멀리 떠가고 있었다. 산은 나아가서 산이 움직이는 곳, 물이 안정되어 맑아 있는 곳, 그곳은 바로 대청호 물이 휘돌아 흐르고 산이 살아서 걸어오는 충남 대덕군 삼산리 대청호 언덕이었다.
대통령 별장이 지어진 명당자리, 그 옛날 임금님께서 하사하셨다는, 원주(原州) 변(邊)씨 선대들이 잠들어 있는 그곳으로 내가 날아간 것이다. 특별히 청남대가 있어 필시 좋은 터, 길지(吉地)일 거라는 막연한 믿음과 임금께서 하사하셨다는 사실을 유추해 보더라도 그 땅은 보기 드문 명당임이 확실할 터였다. 풍수지리라는 학문에 문외한 혹은 초보이긴 하지만 대청호를 둘러싼 산세의 아름다움, 사계절 내내 빼어난 경관은 그곳이 나의 조상들의 유택이어서만은 아니고, 여러 정황으로 살펴보건대 명당이라는 확신은 의문이 있을 수 없었다.
내가 들은바로는 아득한 시절, 아버지의 땅, 그 명당에 이변이 일어났다던가.
나의 할아버지의 유혼(幽魂)은 참람하셨을 것, 절치부심하셨을 것, 땅을 치고 통곡하셨을 터이다. 여러 날 만에 외지에서 돌아와 집 대문 앞에 이르러 홀연히 쓰러지시곤 그대로 이승을 하직하셨다 했다. 몇 손 안에 든다는 천하길지 대청호 - 당시는 금강 지류에 속했던 그 언덕 유택에 드신 것 까지는 순조로웠다고 했다.
당시 아버지 집 안방에는 돈 무더기가 산을 이루었다고 했고, 가솔들이 전부 달려들어 종일을 세어도 끝이 안 날 만큼 아버지는 그 지역의 부자였다고 한다. 그런데 난데없이 할아버지의 산소를 훼손하고 사육신도 아닌데 관에서 시신을 꺼내 화장을 했다던가. 매장을 한 후 다시 화장을 한 것이다. 그런 다음 금강 하구에 흘려 보냈다고 하던가. 괴이쩍은 그 스토리가 어린 날 이후 내 뇌리에 늘 남아 있었다.
그때부터였다고 한다. 아버지의 땅은 점점 줄어들기 시작, 산이, 전답이, 과수원이, 여러 지방의 집들이 남의 손으로 넘어갔다. 땅만 사라진 게 아니라 안방에 수북하게 쌓여있던 돈 무더기도 자취를 감추게 되고, 머지않아 아버지는 목숨까지 잃는 비운을 맞았다. 어찌 아버지뿐이랴. 큰언니와 남자형제들이 졸지에 유명을 달리했다. 패망과 소멸의 정도는 빠르게 진행되었고 엄청난 불행도 함께 따라왔다. 집안은 미친년 널뛰는, 도깨비 장치는 집으로 변한바 되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왜 그랬을까. 누구의 말을 들었던 것일까. 땅을 한 번 가지면 자손에게 물려주기 위해 팔지 않는 게 정설이거늘 아버지는 무엇 때문에 그 많은 재산을 종잇조각 던지듯 하신 것일까. 대체 무슨 이유로 할아버지의 유택을 손상했으며 법도를 벗어난 장법으로 할아버지의 영가(靈駕)에 씻지 못할 허물을 남긴 것일까.
과수원이 있는 그 산에서 어릴 때 우리 형제들은 살구, 복숭아를 따먹으며 자랐으나 결국은 빼앗긴 땅이 되었다. 집안에 드리운 수수께끼를 풀자 해도 지금은 증언해 줄 누구도 없다. 단지 내가 기억하는 것은 살구꽃 복사꽃이 곱게 피었던 그 산의 수밀도 과수원과 원두막의 정겨운 형상만이 망막에 아른거릴 뿐이다.
땅을 잃고 돈을 잃고 비명에 간 내 아버지를 생각하면 언제라도 대청호의 비밀을 밝혀내고 싶다.
신산스런 삶의 여정을 돌고 돌아서 마침내 돌아가 묻힐 땅, 이 세상 떠난 후 후손들에게 좋은 기운을 끼칠 수 있는 후덕하고 온화한 땅에 대한 관심으로 나는 지금 풍수학 강의를 경청하고 있다.
내 마음이 멀리 드난살이 할 동안 풍수학 원전 독해는 몇 페이지를 훌쩍 넘겨 있고, 크고 넓으며 평평한 땅에 이르듯 내 먼 나들이는 청오경에 이르러 숨을 고른다.
세지형앙(勢止形昻) 산맥은 멈추어 서는데 그 산형은 우뚝하고
전윤후망(前潤候罔) 앞에는 시냇물이 흐르고 뒤에는 산등성이나
언덕이 받쳐주게 되면
위지후왕(位至侯王) 그 지위가 제후나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될 것이다
형지세축(形止勢縮) 산형은 멈추어 서는데 산세가 곧게 축약되고
전안회곡(前案回曲) 명당 앞으로 안산이 돌아서 굽어들게 되면
금곡벽옥(金穀璧玉) 돈 곡식 보물 등 귀한 물건들을 손에 넣을 수가 있을 것이다
연이어서 한 사람, 한 사람 돌아가며 원문 전체를 읽고 해석하는 사이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대청호의 물결은 요동치다 멈추고, 대청호로 가는 길목에 억새풀의 춤사위도 드디어 잠잠하다.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고, 마침내는 우리 모두가 가는 곳, 가야만 할 곳, 본래 왔던 그 곳 그 자리. 초록이 울창하고 무성한 대 자연의 품, 땅의 오묘한 진리를 터득한다. 땅이 가지는 불가사의한 능력과 생기와 가능성을 꿈꾸며 청오경의 구절구절을 음미한다.
아버지의 땅이 길에서 흉으로 갈라졌던 요인은 하늘에 있었을까, 땅에 있었을까. 어쩌면 다른 무엇도 아닌 사람의 소행일지 모른다는 한 가닥 깨달음 속에 강의는 종료된다. 인간에게 땅은 어떤 의미인가 하는 엄숙한 교훈을 얻은 귀한 시간이었다.
출처 - 변영희 제6수필집 <갈 곳 있는 노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