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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은(고침 9.14)

능엄주 2022. 9. 14. 21:59

내 영혼은(고침9/14)

 

능엄주 2022. 3. 25.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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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은


나는 늘 일기처럼 써오던 짧은 글쓰기조차 할 수가 없다. 심란스러워 한 문장, 단어 하나도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다. 밖으로 뛰쳐나가서 어딘 가로 정처 없이 달려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 안의 모든 기관 부위에서 시뻘건 불길이 이글, 이글 타오르는 것 같았다.


마침 잘 되었다. 국제 펜 심포지엄 거기에 가자! '한국문학과 노벨문학상' 얼마나 멋진가.  심포지엄 제목이 너무나 황홀했다. 나는 마음을 다스리고 집을 나섰다. 작심이 늦어 지각 염려가 있었지만 지하철이 잘 연결되면 지각은 3분에서 5분 일 것이다. 신촌 역에서 내려 빨리 걸어가면 지각을 가까스로 면할 수 있었다.


하늘이 잔뜩 흐려 비가 올 듯, 우산까지 챙겨 서울특별시에 오니 어리둥절했다. 대학가는 온통 휴강인가. 내가 살던 때에 비해 신촌 오거리는 매우 썰렁했다. 출구 계단은 멀고 길었다. 이곳은 여태 왜 엘리베이터가 없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신촌 역을 중심으로 연세대학, 이화여대. 서강 대학 홍익대학, 4개 명문 대학이 위치한 젊음의 거리여서 인가. 계단에서부터 나는 숨이 가빴다. 3번 출구로 나와 연세대학 정문까지 두세 정거장을 걸어가야 했다. 정문에서 바라보는 백양로 프라자는 몇 불럭이나 떨어져 있었다. 군데 군데 국제 펜에서 나온 안내원이 있어 길 찾기는 수월했다. 걸어서 가노라니 쌀쌀한 봄 날씨에 후꾼 땀이 날 만큼 힘들었다.


나는 방명록에 이름을 쓴 다음 자료집을 받아 들고 홀 안으로 들어섰다. 와아! 놀라웠다.  오미크론 확산으로 00명만 초대한다는 메일을 받은 것 같은데 웬 걸, 수 백 명이 이미 각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다.
'동해물과 백두산~ 이 흘러나왔다. 나는 얼른 빈자리에 내 가방을 내려놓았다. 평소에 노래 부를 일이 발생하지 않으니, 나는 더욱  힘차게 애국가를 따라 불렀다. 목소리가 소멸하지 않고 있어 하이소프라로 뽑았다. 순국선열과 작고 문인에 대한 묵념까지 나는 쿨하게 잘 마쳤다. 거끼까지는 좋았다.


심포지엄 막이 올랐다.국제 펜  이사장님 인사 말씀에 이어 래빈 축사, 주제 발표가 막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전생에 공부 못해서 죽은 귀신이 들린 듯. 자료집을 처음부터 쫙, 훑어보고 나서  그때서야 전후 죄우로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흠! 밝고 고아라! 개나리 진달래 목련 등, 봄 꽃이 활짝 핀 것 같은 화사한 시인들이 보였고, 무대 앞쪽에 주제 발표 혹은 토론자로 나온 낯익은 문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 오직 변문원 씨만 초라했다. 지독한 스트레스로 머리칼이  뭉턱 빠져 뒤통수가 훤한 내 형상, 거울이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나의 심안(心眼)에 명확하게 보였다.  마스크로 얼굴이 반 쯤 가려졌지만 섬나라 왕 모기와 흉악 무도한 벌레에 뜯긴 흔적, 바닷바람과 자외선에 무한 노출돼 불그스럼하고 거무죽죽하게 변한 피부, 수시로 벅, 벅 긁을 만큼 가려운 부위가 나는 떨떨했다. 내가 걸치고 나온, 연희동 보살이 강제하다시피 나에게 구매를 충동한 고가?의 바바리코트조차 내 깊은 울적을 명랑하게 살리지는 못했다.  


삶의 무대에 일찍이 '나'는 증발하고 존재하지 않았다는 자성이 왔다. 내 인생에 단 한 번도 내가 주인인 적이 없었다는 사실, 작품을 창작하면서 매양 소설 속에 나를 구겨 넣고, 내가 나를 방치, 학대, 노예처럼 끌고 다니면서 혹사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저 봄 꽃으로 빛나는 밝은 얼굴들! 자기 자신을 살며, 자신을 꽃으로 가꾼 저 득의 양양한 모습! 

확진자로 학원도 못 가고 쉬고 있는 두 애들과 그들 아빠의 슬픔이 못 내 마음에 걸렸는데 그 울적에 불똥이 튄 것일까.

나는 테이블 위에 펼쳐 놓은 자료집과 식수를 한 병 챙기고 바로 그 장소를 나왔다. 계단을 오르는데 몸이 휭! 어지러웠다. 발이 헛 놓였다. 애초 외출이 허용되지 않는 컨디션이었다. 경기도에서 서울특별시까지 불시에 날아왔고, 불시에  후퇴하는 발걸음이 정상은 아니었다.


그윽한 백양로를 천천히 걸어 지난날 매일같이 오가던 현대 백화점 거리로 나왔다. 후배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신촌에 가면 으레 후배를 만났는데 오늘 따라 통화가 어렵다.
가긴 어딜 가니? 그 기분으로는 울지도 웃지도 못해! 그냥 집으로 가라! 또 하나의 나가 명령했다.


집으로 돌아오자 나는 안도했다. 처음부터 집 밖으로 나가지 말았어야 했다. 내 영혼은 이제도 저 아득한 남해의 외딴 섬 노도에 머무는 것이다. 섬을 떠나오지 못한 것이다. 나를 붙들고 있는 것은 고요섬  노도의 노을이고, 앵강만 바다 갈매기고, 노도 섬을 온통 황금색으로 물들이는 유자 나무와, 핏빛 서러운 정열의 동백 나무 숲이었다. 서포 김만중 선생의 죽음에 버금가는  급수 높은 고독이었다. 나에게 서울은 아직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