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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잎 클로버에 홀리다

능엄주 2022. 8. 19. 21:42

네 잎 클로버에 홀리다.

 

장어를 사다가 냉동고에 넣어두었단다. 날 잡아서 자기 집으로 오라고 했다. 그이는 늘  바쁘고 나 역시 책을 쓰고 출간하느라  분주다사했다. 게다가 발가락 부상을 입어 정형외과로 한의원으로 다니며 차일피일 하다보니 장어  이야기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이에게서도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다.

 

이른 아침이었다. 다시금 장어에 대해 그이가 전화를 했다. 내 발가락 부상이 나으면 나는 내 고향 청주로, 며느리와 함께 서른세 날을 금식하면서, 율무밭에 나앉아 냉이를 캐다가 울음을 터트린 화순 산골에도, 100여일 간 온갖 고생을 하면서 [남해의 고독한 성자聖者]를 집필하던 남해에도, 내 작업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준 분들도 찾아가 볼 생각이었다.

 

그이의 전화가 온 날은  마침 광복절, 며느리의 제삿날이었다. 2013년 8월 15일, 자정을 막 넘긴 24시,  5분 후에 애들 엄마는 세상을 떠났다. .나는 오전에  잠시 다녀올 생각으로 아픈 발을 끌다시피  그이의 집을 방문했다. 나의 신간을 그이에게 전해준 다음, 시원한 냉차 한 잔 마시고 돌아올 셈이었다. 

내가 도착하자 그이는 또닥또닥 칼도마를 두들기며 요리를 시작했다. 안 해도 되는데, 요즘 입맛도 없는데,  땀흘리고 일하지 않으면 좋겠는데, 내 생각은 그랬다. 나는 잠깐 머물다 가겠다는 내 생각을 관철 시킬 기회를 찾지 못했다. 

 

식탁에는 여러 가지 반찬이 진설되고 후라이 팬에서는 장어가 향기롭게 익어가고 있었다. 나를 위해 음식을 만드는 그이에게 미안하고 부담을 느꼈다. 맛난 냄새가 어우러진 식탁에 앉았다. 양주에 장어구이가 내 무거운 마음을 중화시켰던가. 나는  그동안 모아둔 이야기를 다음으로 미룬다. 오랜만에 만나 그이를 힘들게 한 것 같아 서둘러 돌아갈 준비를했다. 

 

큰 길을 두고 아파트 단지 사잇길로 걸어나왔다. 그 길은 클로버가 군데군데 소담한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보라색 엉컹퀴도 피어있고, 금계국도 더러 눈에 띄었다. 나는 벤치에 앉았다. 그 땅은 네잎 클로버 영지營地였던가. 놀랍게도 네잎 클로버가 눈앞에  있다. 하나 둘이 아니고 무리져 있다. 나는 네잎 클로버 다섯 개 정도 따서 내가 늘 휴대하는 노트 갈피 갈피에 소중히 갈무리했다.

 

새로운 장난감을 얻은 어린이처럼  기쁘게 지하철역으로 내려갔다. 지하철은 자리가 널널했다. 자리에 앉았다..그제서야 나는 그이가 챙겨준 영양 음식과, 내 양산이 들어 있는 종이가방 생각이 났다. 그 가방에는 번식력이 왕성하여 빠르게 꽃을 피워내는 우산란 가지도 한 개 들어 있었다. 

 

목적지에 이르렀다. 착오, 분실의 원인은 네잎 클로버에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네잎 클로버에 정신이 팔린 게 문제였다. 행운의 네잎 클로버를 얻은 대신, 그이의 정성을 잃은 것이다. 마음이 씁쓸했다. 말복 더위에  음식 만들기는 쉬운가. 타인을 불러 식사를 대접하기는 또 얼마나 신경쓰이는 일인가. 그이는 번번이 나에게 대보살이었다.

 

그날 밤 아들을 도우러 가는 길에 나는 각성했다. '학교 오가면서 '제발 해찰 좀 부리지 말라'는 어린 날의 어머니와 언니의 충고를 떠올렸다.  우연히 잘 만난 천생연분을 물라본 우둔함,  주를 방심하고 부에 열중한 때문에 내 인생도 해찰이 장애요소가 된 건 아니었을까. 대도를 비켜 소도를 선택한 건 후회해도 소용없는 내 인생 최대의 실책이었다. 

 

네잎 클로버가 숱하게 보여도 무심하리라. 그냥 지나가리라. 내 노트에 그걸 보관해서 편지에 끼워 보낼 일도 없다.  꿈꾸는 소녀도 아니지 않은가. 제사를 돕고 뒷처리를 말끔히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더할 나위 없이 숙연했다. 인생 미숙未熟에서 깨어나라!  이는  오늘의 네잎 클로버가 나에게 준 삽상颯爽한 교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