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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영희 소설집 <열일곱의 신세계>를 읽고/곽정효

능엄주 2022. 8. 14. 03:35

 

 

변영희 소설집 <열일곱의 신세계>를 읽고/곽정효
변영희
2020-09-17 10:18:45
 
변영희 소설집 <열일곱의 신세계> 속에는 신산한 삶을 살아내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우리 주변에서 언제고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나라 역사를 뒤돌아 파보면 곳곳에 웅크리고 있는 질긴 목숨들이다.


<아카시아 꽃의 비원>을 보자. 슬프고 암담한 여인과 그 품에서 자라나는 아이들, 희망을 읽을 수 있다. 석유 파동이 뭔지도 모르는 아이들과 젊은 엄마가 그 파동을 감당한다. 가정은 망가졌지만 가족을 지켜낸다. 어린 아들들은 거지라고 놀림 받고 주인집 여자의 냉대와 멸시에 잔뜩 움츠린다. 먹을 것이 없고 거처할 곳마저 막막하다. 그래도 삶의 끈을 움켜쥔다. 남편은 결국 돌아오지 않는다. 더 기다릴 수 없어 덜 야박한 사람들이 사는 시골 마을로 이사한다. 하루하루가 고생길이지만 아이들은 커간다. 밭을 매다가 쓰러진 후 일어나지 못한다. 하늘나라로 날아가는 엄마를 부르는 세 아이들은 지상에 남은 눈물이다. 엄마의 가슴만 적시는 눈물이 아니다.
 

<화려한 초대>의 동진은 부모와는 일찍 사별했고 1977년 갑작스런 집중호우로 할머니마저 잃었다. 산에서 실종되었던 동진은 산속에 갇힌 지 스무하루 만에 발견되지만 갈 곳이 없다. 미국으로 입양되어 시카고에서 큰다. 현석 어머니는 상상도 하지 못한 그의 금의환향, 화려한 초대에 가슴이 먹먹하다.
 

<꽃밭 방공호>의 봉희가 겪어야 했던 시절도 악몽이다. 일제가 물러갈 무렵 방공호 속에서 웅크리고 살아내야 했던 공포와 미 ‧ 소에 의해 분단의 장벽이 세워지게 된 비극, 어린 봉희의 가슴은 졸아 붙었지만 시간이 지나 소설로 쓰고 싶은 큰 꿈이 된다.
 

<소울 메이트>는 조금 특별하다.
소울 메이트를 찾고 있는 희주의 꿈속에 웬 남자가 나타난다. 희주는 그를 찾아 나선다. 꿈을 더듬어 산에 오른다. 어머니는 33일 단식으로 피폐한 몸을 이끌고 함께한다. 병든 몸을 바꾸기 위해 전생과 다른 식생활을 해야 한다는 말과 사찰의 주지 스님이 전생의 인연을 들려주는 장면은 묘하게 이어진다. 스님이 들려준 고구려 안장왕과 구슬 아씨 한주의 연애사가 다음 생으로 옮겨온 듯 희주에게 한 남자가 나타난다. 눈이 마주치자 희주가 소울 메이트!라 외친다. 인생은 소울 메이트라는 작가의 생각이 낳은 허구가 시공에 가려져 있는, 견고한 문 안쪽을 잠시 보여 주는 작품이다
 


<열일곱의 신세계>도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열고 나가는 인애의 모습이 오래도록 잔상을 남긴다.


작품들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이 카타르시스였다. 문학의 범주가 넓어지고 이론도 다양해져 가고 있지만 문학은 누가 뭐래도 발산 기능을 무시할 수 없다.
카타르시스는 기본적으로 비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비참한 운명을 보고 간접 경험을 함으로써, 자신의 두려움과 슬픔이 해소되고 마음이 깨끗해지는 일을 의미한다. 크게 하늘을 거스른 적도 없으면서 신산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 하는 동안 독자들은 마음을 씻을 수 있다. 지워지지 않는 고통과 화해할 수 있다.
 

가장 눈을 끄는 작품은 <자연인의 셈법>이었다.

모든 사람의 몸 안에 의사가 있다. 몸 안에 있는 의사, 곧 자연치유력이 질병을 낫게 하는 최고의 의사이다. (히포크라테스)
작가는 히포크라테스의 말로 독자를 불러 병과 죽음 앞에 서게 한다.
어쩌면 생로병사는 인간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다. 까마득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자. 그때도 병과 죽음 앞에 선 인간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 작품은 남의 운명을 보고 간접 경험을 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정화하는 경우와는 조금 다르다. 자신의 행위로 스스로를 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며느리를 황망히 보내고 난 후다. 절절한 가슴 속 아픔이 쏟아져 나온다.
의료진으로부터 암투병 3년 차에 다른 데 전이도 안 되고 예후가 양호하다면서 이제 석 달에 한 번씩만 체크받으러 오라는 말을 들었다. 정기 검사하러 가기 전까지 5끼 소화를 시키고 간식도 시간 맞춰 스스로 만들어 먹었다.
하지만 며느리는 수면 내시경 검사할 때 몹시 통증을 느꼈다고 호소한다. 그 후 물 한 모금도 마실 수 없게 되더니 급기야 바닥이 흥건하도록 피를 토한다. 철저히 일방적인 회진이 이어지고 생존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을 듣는다. 며느리는 항암 치료를 감수했지만 더 혹독한 고통을 견디다 세상을 떠났다. 환자에 대한 아무런 연민도 관심도 없는 병원과 의사만 쳐다보고 다른 방법을 찾지 않았던 것이 실수였다는 생각에 괴롭다.

로빈 쿡의 의학 소설<메스>도 떠올린다. <메스>는 의사들이 제약회사의 외판원으로 혹은 하수인으로 전략하여 의사와 환자 간의 유대감은커녕 전율, 가공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 기업의 이윤추구에 감시당하는 의료계의 비리와 부정에 과감하게 메스를 댄 미국 현역 의사의 실화 소설이다.
힘들게 멀리서 찾아온 환자와 컴퓨터만 들여다보는 치료자 사이에 유대감은커녕 소통조차 안 되는데, 제대로 된 치료가 가능한가.? 혹 환자가 어떤 부위든 메스를 대 찢고 자르면 돈이 우수수 쏟아지는 돈지갑으로 보인 건 아니었을까?
사람 살리는 게 아니라 사람 죽이는 약이고 검사였다. 자연 치유를 선택했더라면 최소한 신체의 훼손과 난도질은 면했을 것 아닌가.
안타까움에 억장이 무너진다.


- 치료 약은 모두가 독이며 따라서 먹을 때마다 활력을 떨어뜨린다. 자연에 맡기면 저절로 회복할 것으로 보이는 많은 환자들을 서둘러 묘지로 보낸다.


병과 치유에 대한 물음을 던지며 뉴욕 의과대학 말론조 클라크 교수의 경고로 글을 맺고 있다.
 

자식의 생명이 꺼져가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부모의 애간장은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다. 설명으로는 전달할 수 없다. 천붕 天崩이다. 이 슬픔을, 이 고통을 쓰지 않았다면 그 어둠에서 헤어날 길이 있었을까?
살아오면서 존재 자체를 다 던져 넣어야 했던 상실, 회한, 고통, 황망함… 그것들을 다시 꺼내보고 글로 쓴다는 것은 마음속에 억압된 감정의 응어리나 상처를 외부로 드러냄으로써 강박 관념을 없애고 정신의 안정을 찾는 일이다. 인간을 정화시켜주는 몫이 결코 가볍지 않다. 발산은 그 슬픔과 고통을 인내하고 화해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된다. 그 힘으로 남은 생을 꾸려가고 자라나는 아이들을 돌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