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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능엄주 2022. 8. 6. 13:46

단상

 

1.

구름이 산을 좋아 하는가. 바다를 더 좋아 하는가. 산을 못 떠나고 산 위에 길게 누워 바다를 바라본다. 

어디선가 둥둥 거리는 소리, 그 소리는 기계음 같지는 않다. 바닷속에서 나는 소리인가. 고기잡이 배에서 나는 소리인가. 흰 갈매기 몇 마리 아침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호연지기를 뽐내듯 유유히 비행한다. 비 그쳤어도 바람의 강도는 여전히 심하다. 

 

춥다. 춥다고 창문 열지 않을 수도 없다.  환기하려고 서쪽 동쪽 조금씩 열었다. 나무들 주억거리는 모양새가 나에게 뭐라고 말을 거는 것 같다. 바람의 방향에 따라 주억거리는 형태도 각각  달라보인다. 자연에 내맡긴 생명체는 나무라고 별 다르지 않다. 오늘도 바깥에는 못 나간다. 싱싱한 채소 구입 외에는 굳이 나갈 일도 없다. 냉장고와 서랍에 뭐가 잔뜩 들어 있어도 먹을 만 한 게 없다. 평소에 잘 먹지 않는 라면 종류가 색색으로 너무 많다. 어쩌겠는가. 있는 것 가지고  대강 해결하자.

 

며칠 째 구름 많고 폭우가 퍼붓더니 기온이 차다. 가을이 떠나려는가. 통풍 시키려고 책상 앞 창문을 조금 열었더니 기어이 바람이 달려와 콱! 닫아버린다. 풍세가 자못 사납다. 입안이 텁텁하여 싱싱한 야채를 구하고 싶다는 문자 보냈더니 묵묵부답. 되는 대로 먹고 살자. 이것 저것 찾으면 욕이 된다.

별로 먹을 것도 없는 끼니 해결에 시간이 너무 소요된다. 물김치라도 담아 먹으려는데 싱싱한 채소가 힘든다. 얼마 전 경로당 할머니에게 얻어온 무가 있다. 무를  씻어 연근 차를 우려 물 김치 한 통 담근다. 궁여지책이지만 큰 재산을 마련한 듯 마음이 풍요롭다.  

 

2.

크게 마음 먹고 집을 나섰다. 옆방 작가가 만들어준 지팡이도 버거울 것 같아 집에 두었다. 숨가쁘게 걸어 서포 선생의 허묘 입구에 이르자 겁부터 났다. 3개월 여 동안 노상 앉아만 있다가 과연 올라갈 수 있을까. 사방이 너무나 적막하다. 숲 사이로 수 백의 돌 계단이 이어지고 매우 높았다. 오늘 못 오르면 다음 기회가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아 용기를 냈다.  돌계단마다 낙엽이 켜켜로 쌓여 있어 더욱 조심스러웠다.  

드디어 서포 선생의 허묘에  도달했다. 대견하다. 서포 선생께서 세상 등지고  몇 달이나 머물렀던 곳,  소나무 숲이 빙 둘러있고 풀이 나지 않는다는, 뜻 깊은 장소였다. 나는 작별 인사를 드렸다. 눈물이 핑 돌았다. 

 

허묘 계단을 한 계단 한 계단 조심스럽게 내려와 다시 산길을 올라 서포 문학관에 갔다. 해설사 선생님이 차를 내왔다. 언제나 공손하고 부드럽게 사람을 대하는 그 분이 고맙다. 내가 구운몽원에 올라간다하니  "같이 가 드릴까요?"  마치 내 속마을을 읽은 듯 하다. 울퉁불퉁 서투른 산길을 나 혼자 가기 보다 얼마나 든든한가. 

 

양소유의 첫 애인 진채봉 동상을 지나서 구운몽원, 사씨남정기원, 그리움의 언덕까지, 혼자서는 무서워 엄두를 내지 못하던 곳이었다. 그는 어찌 그리 겸손하고 친절한가. 허묘에서처럼 내 눈에 눈물이 맺힌다.  노도 섬에 와서 내 심신이 하약증세를보이는가. 마침내 그리움의 언덕 정자에 올랐다. 사방으로 툭 터진 공간에 온통 바다가 들어와 있다. 서포 선생이 하염없이 바라보았을 망망대해가 마냥 허허롭다. 

 

한 바퀴 돌고나서 내가 말했다. 고맙다고. 내 고마운 인사에 그가 답했다. "오히려 제가 영광입니다."  

선한 사람과 함께한 기분 좋은 답사였다. 사람에게서도  향기가 난다는 걸 몸소 실감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