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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두의 시간은 축복이었어!

능엄주 2022. 2. 12. 21:14

몰두의 시간은 축복이었어!

 

 

섬에서 돌아온지 한 달 되는 날이다. 오늘 저녁을 기해 나는 6권의 책을 독파했다. 남해지역과 서포 선생 관련 소설책도 있고, 서포가 직접 집필한 장장 700페이지를 상회하는 어려운, 대부분 유교 불교 도교 철학 문학에 속하는 비평서도 있다. 결코 작은 분량, 작은 소득이 아니었다. 읽는 동안 중요한 구절을 만나면 나는 메모를 했고 힘들다 싶으면 자주 쉬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푸른 하늘을 보며 체조도 하고 과일도 먹고, TV를 시청하기도 하면서 한 가지 일로 피로해지고 싫증 나는 것을 방지했다.

 

자리에 붙박혀 앉아서 조용히 책을 읽는 일이 이처럼 사람을 피로하게 하는 것이 놀라웠다. 남 보기에는 신선놀음, 한갓진 서생(書生) 놀이었을 것이다. 움직이는 동물이 움직이지 않고 고정자세를 평균 5,6시간 견디는 것은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그리 수월한 일이 아니란 사실을 경험했다.

 

눈으로 시작된 피로감, 따순 물로 눈을 맛사지 해주었는데 충혈된 눈이 정상으로 돌아오는데 오래 걸렸다. 너무나 긴장돼 있었으므로 잠도 오지 않았다. 그럴 때는 멍청해지는 게 상책이었다. TV를 켜는 것이다. 소리와 그림에 눈을 주고 있다보면 어느 순간 멍청해지고 스스로 졸음이 밀려온다. 옳다! 바로 이 방법이다! 순탄하게 잠드는 방법이기도 했다.

 

20분이고 30분 누워 잠자는 시간은 휴식으로 최적이었다. 당장 몸이 가뿐하고 상쾌하다. 다시 책상에 앉으면 하루 동안 바깥 구경도 못하고 책상에 앉은 채로 앵강만의 노을과는 구별이 되는 경기도의 노을을 만난다. 무슨 세월이 이다지도 빠르단 말인가. 중단없이, 그렇다고 급행도 아니게 흘러가는 시간은 곧 다시 내일로, 미래로 넘어갈 것이다.

 

이렇듯 세속의 재미를 망각하고 삶을 영위하는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인가. 순간적으로 회의를 갖기도 한다. 또한 중요한 볼일을 잊고 있다가 낭패를 당하기도 한다. 보고 싶은 사람들과도 소원해진다. 적어도 카톡이나 문자로 소식을 전하면 했는데 지나고 보면 그런 생각을 했었는지조차 까맣게 잊어버리곤 한다.

 

서로 얼굴도 못 보고 이게 사는 거냐?”

이렇게 시시하게 살을려고 기를 쓰고 공부했나?”

코로나 풀리는대로 우리 다 함께 가까운 국내 여행이라도 다니자!”

들리는 게 부음(訃音)이고 코로나야!”

희망이 안 보여!”

 

지인들의 푸념은 가지각색으로 분출되었다. 그나마 글이라도 붙들고 앉았으니 나의 불만은 사그러 들었는가. 말할 의욕도 스러졌는가. 앵강만의 서정을 담뿍 품은 환상적인 노을과, 끝없는 적요가 장악한 노도 섬의 동백나무 산책로가 새삼 그리워지는 싯점이다. 무량한 적요 속에서 완벽한 몰두의 순간들을 누린것은 큰 보람이었다.

 

나는 놀지 않았어! 심심하거나 적적하지도 않았다. 다만 몸이 아파 침 맞으러 가고 물리치료 다녀온 것 빼고는 집에 이르러서도  6권의 책을 읽느라 착실하게 내 자리를 고수했다. 그래야만 하는 당위를 저버릴 수가 없었다. 나에 대한 약속이고 책무였으니.

 

내일은 또 새로운 계획, 새로운 출발을 기대한다. 나의 갈 길은 아직도 저만치 멀어만 보인다. 젊은 날을 번민과 갈등 가운데 지내온 자의 부질없는 항변이지만 나는 많이 억울하다. 인생의 시간표 안배(按排)가 허술했다. 아니 엉망이었다. 번뇌 우수 망설임 방황 이런 것 다 걷어치우자. 앞으로, 오직 앞으로! 지난 날의 허송세월에 비하면 나의 시간은 촉박하다.

 

저녁 9시도 채 되지 않아서 나는 책상을 물러날 결심을 한다. 오늘은 이것으로, 몸이 괴롭다, 신호를 보내오므로 즉시 행동에 옮길 일이다. 무리는 오히려 해독(害毒)이 된다.

 

부왕보다 똑똑한 왕자가 왕위를 물려받지 못하고 벽지로 귀양오다시피 나라와 궁궐에서 유리돼 슬픈 최후를 맞이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그곳! 다음에 노도 섬에 가게 되면 나는 영험하다는 그 산에 꼭 가보리라! 미래의 더 맑은 꿈을 위해서...

그러니 오늘은 이만 책상을 거두자! 그동안 노고가 많았다. 마침내 내가 나에게 존중찬탄을 읊는다. 잘 했어 문원(文苑)! 더 잘 할 수 있어. 몰두의 시간은 축복이었어!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