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저바다
아름다운 저 바다
어떤 일을 도모할 때 망설임이 앞서면서 썩 내키지 않을 때가 있다.
이유는 현재 하고 있는 일에서 헤어나기 어려울 경우에 특히 그렇다. 새로운 지역에 왔으니 새로운 풍경, 이를테면 그 지역에서 이름난 곳을 찾아가고 싶은 마음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다 있을 것이다.
잠시 짬을 내어 움직일 수는 있다. 전혀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움직인 이후가 항상 문제였다. 집밖으로 나가기 전까지 몰두했던 일에서 놓여나 자유를 누리고, 많은 시간을 다른 장소에서 다른 풍경을 감상하고, 평소와는 다른 음식을 먹고 차를 마신다. 그렇듯 문학기행이라는 명분으로 기분 전환을 하고나서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융통성 부재인가. 할 일을 미루게 되어 걱정되는가. 귀가할 날이 가깝고 일은 더뎌 애태우는가.
그날 아침 나에게 던져진 화두는 택천쾌였다. 결단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썩 원하지 않는 외출, 일상에서의 일탈을 심사숙고하라는 천지신명의 예시豫示로 받아들여야 옳았다. 그런데 미련할 만큼 오래 책상에 붙박혀 있어 한 편으로는 바깥 바람도 쐬고 싶었다. 많이 망설이다 따라나서기로 작정했다. 바람이 불면 배가 운행하지 않으니 날씨가 이곳에서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갈곳도 없지만 풍랑으로 배가 바다에 뜨지 않으면 바다를 바라보고 있기가 갑갑하고 따분했다. 그리고 무서웠다. 갇힌 기분에 종일 우울했다.
자주 비바람불고 파고가 심할 수록 언제 집에 갈 수있을까. 언제 이 과제를 다 마칠 수 있을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안했다. 그 불안 심리가 외출을 부추겼는지도 모른다. 불안하면 글도 무엇도 되는 일이 없다. 더구나 타지에서 생활할 때는 마음의 평화가 가장 중요하다.
8시 배를 타고 노도 창작실 입주생 모두 문학기행에 나섰다. 바닷물이 잔잔하고 하늘은 맑았다. 변덕스런 날씨가 그날따라 초가을처럼 온화하고 상쾌했다. 먼저 용문산 염불암에 갔다. 그곳에 서포 선생 수륙대재를 봉행하던 스님이 오신다고 했다. 약속을 한것은 아니지만 은근히 기대를 가졌고, 설사 계시지 않더라도 일단 답사는 하고 와야 할 것 같았다. 왜냐하면 서포 선생은 바로 호구산(일명 용문산) 용문사 근처에 적소가 있었고, 용문사를 출입하면서 불가에 접하고 승려들과 교류하는 가운데 구운몽 저작의 꿈을 태동, 잉태했다는 기록이 있다. 염불암은 천년 고찰 용문사보다 더 높은 곳에 위치했다. 산길이 가팔랐지만 우리들의 문학활동을 적극 지원해주는 노도 섬 소장님이 먼 산까지 차로 우리를 데려다 주어 수월했다.
염불암에 오르니 앵강만 바다와 노도 섬이 저 아래로 보였다. 큰 산을 좌우에 거느리고 그 중앙에 오롯이 들어앉은 노도섬이 꿈의 섬처럼 더욱 실다웠다. 아침 공기는 신선하고 차밭은 염불암 돌담 아래 넓고 푸르렀다.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께 예배드리고 나서 햇살 밝은 툇마루에 앉았다. 코로나로 법회는 열리지 않았고, 총무스님이 나오셔서 우리에게 좋은 말씀을 들려주셨다. 나는 오기를 잘 했구나! 여겼다. 배울 것 볼 것이 분명 있었다.
다시 산길을 내려와 용문사에 갔다. 두번 째 방문이었다. 봉서루에서 먼젓번에 방문했을 때 뵌 적 있는 주지스님의 법문이 진행중이었다. 우리는 감히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아쉬운 발걸음을 돌린다. 길현 미술관은 아예 문이 닫혀 있었다. 코로나로 인해 모든 행사를 중지했다고 한다. 다시 차를 타고 '뮤지엄 남해'로 갔다. 여기도 썰렁하기는 마찬가지였으나 문이 열려있으므로 관람은 가능했다. 천혜의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남해 전역에 코로나 19로 인적이 드물다. 휑한 공간이 매우 아쉬웠다.
독일마을로 가서 다리도 쉴겸 다과를 들었다. 점심식사로는 부족한 젊은 친구들이 독일빵집에서 나와 식당을 찾았다. 식당이나 공공장소에 가는 게 많이 조심스럽다. 관음포가 있는 지역으로 이동했다. 큰 식당을 발견, 문을 열고 식당에 들어가자마자 주인이 나오더니, 대뜸 우리들의 체온을 재고 백신접종을 확인하는 절차와 자세가 귀찮고 성가셨다. 배가 고파 밥을 먹으려고 와서 그런 간섭을 받는 게 불편하기도 하다.
대강 밥을 떼우고 관음포로 걸어갔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노량 앞바다에서 결전을 펼친 유서깊은 곳이었다. 충무공같은 충신도 원균의 참소로 전투중에 투옥되기도 했다. 자기보다 월등히 잘난 사람을 못봐주는 행태였던가. 치열한 전투현장을 떠나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다니, '한산섬 달밝은 밤'을 읊은 이순신 장군의 심사는 과연 어떠했을까. 어디에나 어느 시대나 간신과 충신은 함께 거한다.
우리는 이순신 장군의 숭고한 애국 정신을 떠올리며 노량 앞바다를 향해 그 시절 승전고를 울렸음직한 큰 북을 내리 쳤다. 북채가 북을 때릴 때마다 어디선가 승전의 함성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아! 이순신 장군이시여! 위대하십니다. 장하신 승전, 순국의 정신 존경합니다. 편히 잠드소서. 우리 일행은 사당과 분묘를 두루 돌아보면서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겨울해가 빨리 지므로 우리는 서둘러 간단히 시장을 본 후에 벽련항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이 무슨 일? 그 무슨 일이라는 것이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내 앞에 벌어졌다. 5분~ 10분이면 노도 섬에 도착하는 노도호가 중간에 우리에게 다른 배로 옮겨 타게 했다. 나는 시퍼런 바닷물에 겁을 집어먹었다. 배를 갈아타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어려움은 다음에 닥쳤다. 노도항 부둣가에 바지선이 정박하고 있어, 우리가 갈아탄 고깃배는 난데없이 어중간한 절벽 앞에서 우리에게 하선하라고 명령했다. 앞뒤를 돌아볼 틈이 없다. 날은 저물고, 바닷물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찌하든지 절벽을 기어올라야 한다는 것밖에는.
3,4 미터 높이의 절벽을 오르는데 가장 위기의식을 느낀 사람은 나였다. 뒤에서는 재촉하고 앞에서는 절벽 위로 이끌어 올려주는 사람도 없다. 내가 절벽을 오르는 과정에서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재빠르게 절벽위를 올라간 소위 선장이라는 남자가 중간에 내 왼손을 놓아버린 것이다. 양 팔을 꽉 붙들고 힘차게 끌어올려야 할 것 같은데 선장은 겨우 내 왼손가락 다섯개를 쥐었다 놓은 격이었다. 이를테면 붙잡아 주는 시늉만 하다 놓아버린 것이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나는 사력을 다해 기어오르다 그만 절벽 꼭대기에 왼팔을 걸치자마자 오른 무릎을 꺾으면서 비정상적인 자세로 고꾸라졌다. 밑에서 밀어올리는 사람도, 위에서 끌어올리는 사람도 없는, 각자 위급한 처지였다. 타인을 배려하거나 도울 상황이 아닌 것이다.
무엇보다도 배(船) 실무자가 인명을 보호하는데 안일하고 무책임했다. 어쩌자고 내손을 놓아? 두 손으로 두 팔의 중간쯤을 잡고 끌어올리는 게 맞는 방법 아닌가. 더욱 한심스러운 것은 배 운행하는 이들의 안전 불감증, 무감각, 무지함이었다. 언제나 공공의 장소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안전 사고는 인명 경시와 무사 안일의 방만한 운행 실태에 원인이 있다.
구구루 책상이나 지킬 것이지 썩 내키지 않는 문학기행은 왜 가나? 작업을 종료한 다음 한가로이 답사하면 될 것을. 누구에게 생명의 안전을 의탁한단 말인가. 잘못은 나에게 있다. 나는 눈에 띄는 상처는 없는 것 같은데 온몸이 얼얼하고 지글지글 아팠다. 처음의 망설임이 나에게는 정확한 예시豫示였다. 후회가 깊어갈 수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일주일을 허비했다. 그 일주일은 현재의 나에게 金과 동일한 가치였다. 얼른 병원에 가지 못한 이유는 또 그 위험한 배를 타야하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머물며 노상 '아름다운 저바다와 그리운 저 빛난 햇빛' 을 노래했는데 이젠 배도 바다도 인성이 바닥인 사람도 두려울 뿐이다.
나는 자연치유를 바라며 일주일을 허비했다. 점점 걸음걸이가 비틀리면서 전신이 요상하게 아파왔다. 복숭아씨 뼈 부분이 저리고 무릎 안쪽이 날이 갈 수록 통증이 심해졌다. 배를 타고 육지로 나가 병원에 갔다. 정형외과는 코로나19 백신 접종으로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국록을 먹고사는 방역중대본부가 전 국민에게 매일 매 시간 계속해서 문자를 보내는 한, 늘 저 모양일 것이다. 장날의 시장판이나 다를 게 없었다. 그 북새통을 뚫고 간신이 X레이를 여기저기 찍고 주사맞고 물리치료 받고 약을 타가지고 돌아 왔다.
병원 다녀온 소감 또한 불만이었다. 환자에게 덜미치듯 빨리 말하고 빨리 움직이라고 등을 떠밀었다. 물리치료는 이때껏 내가 받아온 그 수준에 전혀 미치지 못했다. 단 두 군데만 치료한다면서 이미 바닥에 깔아놓은 핫팩을 무자비하게 수거해갔다. 모든 순서가 대강, 대충이었다. 부실하고 성의가 없다. 내일은 한의원을 가야할 것 같다. 말 한마디라도 친절하게 해주는 게 양의보다는 한의 같아서다.
왼팔에 검은 붕대를 칭칭 감았다. 시금시금 저리고 아프다. 팔 안 빠진 게 천만 다행이었다. 내키지 않고 망설임이 따르면 그 마음을 존중해야 한다. 내가 나를 살피지 않고 함부로 움직인 대가 치고는 가혹하다. 정형외과 약은 왜 그리 독한지 사흘 밤낮을 몸 전체가 비비 꼬이면서 죽기살기로 앓았다. 너무 고통이 심하니 죽도 안 먹게 되었다. 작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되었다면 비행기라도 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나는 걱정한다. 임인년이 밝아오기 전까지 내 작업을 종료할 수 있을지, 이곳에 왜 왔는지 그 목적을 생각하면 아파서는 절대 안된다. 요긴한 자료도 더 구해와야 한다. 내가 대학원에서 배우고 공부한 작자 미상의 자료로는 글의 정확도를 기대할 수 없다. 작자미상도 이곳에 와서 처음 알게 되었다.
되가는 대로. 마음을 편하게 먹으라는 史由의 조언을 생각한다. 나도 그럴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도 섬 서포 선생의 유배지에 온 보람은 결코 적지 않다고 여긴다. 영靈으로라도 서포 선생과 만났으니까 작품도 쓰는 게 아닐까. 사건 사고도 경험이고 연마일터, 마음을 크게 가지기로 한다. 미안한 줄도, 왜 사람이 다치게 되었는지 사과할 줄도 모르는 인성 부재와 맞서기에는 내 시간이 아깝다.
바다가 으르렁 거린다. 다시 혹한이 닥치려는가. 나는 거센 바람소리를 들으며 다시 택천쾌를 의식한다. 마음을 조율하는그 중심에 '나'를 두기로 한다. '나'를 애호하려고 한다. 병원에나 다니면서 반강제로 수동적인 죄인이 되기 싫다면 말이다. 무엇이든 망설임이 앞설 때는 조심하기로 하자.
아름다운 저 바다와 그 빛난 햇빛
내 맘속에 잠시라도 잊을 수가 없구나
향기로운 꽃 만발한 아름다운 동산에서
내게 준 그 귀한 언약 어이하여 잊을까
멀리 떠나간 그대 나는 홀로 사모하여
잊지 못할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노라~
나는 이곳에 와서 극적(劇的)으로 내안의 노래를 살려냈고, 늘 작업 후에 '돌아오라 쏘렌토로' 이 노래를 불렀다.
아픈 몸이 회복되어 앞으로도 계속 노래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