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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기가 튀었다.

능엄주 2021. 9. 30. 20:13

세탁기가 튀었다.

 

노도 섬에 온지 사흘 째, 사건이  터졌다. 세탁물을 넣고 30분이 채 되었을까 말았을까.  세탁기가 대반란을 감행? 한 것이다.  마른 하늘에 천둥 번개라도 이처럼 사람을 놀래킬 수 있을까. 줄땀을 쏟으며  연 삼일, 모기떼와 각종 벌레와 건축 먼지를 어지간히 털어내고 다소 정리가 되었다.

 

세탁물을 모아 세탁기 안으로 집어넣은 다음, 노트북을 열고 작업 개시에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나는 레시던스가 뒤집어지는 듯한 덜커덩 거리는 소음에 놀라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소리는 바로 내가 앉아있는 책상 위치에서 2~ 3m정도 떨어진 주방, 식탁 상판에 부착된 드럼 세탁기가 뿜어내는 위급한 절규였다. 제 위치를 탈피한 세탁기 몸체가 덜컹 덜컹 덜커덩! 무섭게 굉음을 토해내면서 거실 바닥으로 튀어나오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머! 어머! 어머나! 이를 어째? 어,어, 어!

혼자서 괴성을 지르면서 거실 바닥을 빙빙 돌았다.  나도 모르게 마구 큰 소리를 질러댔다. 이 외진 섬에, 도시보다 밤이 일찍 찾아오는 이 산중에, 의로운 행인 한 사람 있을까. 

섬 주민들이 사는 마을은 저 아래로 멀었다. 내 좌우에 입주해 있는 문객들은 지금 식사시간일까. 바로 옆집이라 해도 동棟 호 수가 다르니 내 비명이 들릴 리가 없다. 

 

어떻게 해? 어떻게 하지?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고 카톡을 날렸다. 손가락이 파르르 떨려 글자가 제멋대로 찍힌다. 관리기사가 곧 답을 보내왔다. 내일 방문하겠노라고. 3호실 작가가 달려왔다. 그는 튀어나온 세탁기 사진을 찍어 단톡방에 올렸다. 그도 역시 세탁 중에 세탁기가 튀어나왔다고 했다. 두손으로 밀고 땡겨서 겨우 원 위치에 복구 시켰다고 한다.  젊은 남자 작가인 그는 힘도 세고 기계 작동 원리를 좀 알고 있거나 튀어 나온 이치를 헤아렸던가. 

 

그러고나서 나는 배가 사정없이 아파지기 시작했다.  화장실로 막 달려가야 할 만큼 절박했다. 신경성인가. 세탁기 쇼크인가. 낮에 군청 문화관광과 직원분들이 래방했다. 입주작가들을 도와주고 챙겨 줄 노도 주민 몇 분을 모시고 노도창작실 입주식을 간략하게 열어주었다. 최초의 입주자 입장에서 요구한 비품에 관한 것도 우리는 수월하게 허가를 받을 수 있어 감사했다. 사진 몇 컷 찍고 돌아와서 초콜릿 한 쪽 먹고 호두와 딸기 젤리를 먹어서인가.

배가 아파 저녁밥은 아예 먹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엄마의 식사가 부실할 것 같다'면서 무엇을 더 택배 보내준다는 딸의 제안을 거절했다. 내가 여기 호사누릴려고 온게 아니잖는가. 나 배 안 고파! 걱정 마! 이렇게.

 

그런데 위장도 일대 변혁을 맞이하여 괴로운가. 물을 갈아먹어서인가. 평소에 국을 잘 먹지 않지만 오늘은 유별나게 따끈한 국물이 먹고 싶다. 마른 보리새우 한 줌 넣고 재래식 된장 풀어 얼큰하게 끓인 가을아욱국을 한 대접 훌훌 마시고 싶은 거다. 냉장고에 인스턴트 황태국이 있다. 보나마나 인공조미료 범벅 그 맛을 누가 보장할까. 생활환경이 바뀌니 조리기구도 식재료도 부족한 처지에 나 혼자 먹겠다고 무엇을 끓이거나 만들기가 용이하지 않다. 

 

입주 3일 째, 이곳 생활에 적응도 미처 못 했는데 세탁기 사건은 무슨 악재인가. 액운을 미리 막아주는 방패일까. 오늘서야 노트북을 열었는데. 사고가 터지다니! 작년 가을 토지문화관에서 쓴 소설을 손보기 시작하자마자 괴변이 일어난 것 아닌가. 나에게 소설 쓰라는 거냐, 말라는 것이냐. 생소하고 외진 곳에 와서 연 3일, 시련이 크다면 크다. 시간적 손실도 묵과할 수 없다. 이 시련이 약이 되어 지뢰복,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는 것이면 더할나위없이 기쁜 일 아닌가.  

 

옆 동의 시인이 밤 바다 구경도 하고  부두에 나가보자고 전화했다, 별빛이 좋고 운 좋으면 유성流星도 볼 수 있다고 유혹?한다. 요즘 앵강만에서 고등어가 많이 잡힌다며 회뜨는 이야기도 덧붙인다. 갓 잡은 고등어를 사오게 되면 요리는 어떻게 하는지를 이야기 한다. 그녀는 언제 어떻게 앵강만 고등어 소식을 빠르게 접했던가. 나는 이 싯점에서 작업을 하기도, 덜컹거리고 튀어나오다가 훼손된 세탁기를 바라보기도, 잠을 자기도 어정쩡하다. 차라리 노도의 밤하늘을 보러 야간 산책을 나가보기로 한다. 나는 반코트를 걸치고 나갈 준비를 서두른다.

 

사흘에 걸친 시련?은 바다가 없는 충청도 소도시에서 태어나 무심천을 바다로 여기고 성장한 나에게, 전혀 유형이 다른 기氣가 접속돼 상충하는 현상이 아닐까. 그다지 심각하게 고민할 일이 아니었다. 내가 잘못해서가 아니고 세탁기가 저혼자 돌다가 튀어나왔으니 업체가 나서서 수리해줘야 하는 상황이다. 살다보면 별별일 다 생긴다. 지나고 보면 이 마저도 노도에서의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이다. 아무 것도 심려할 게 없다. 세상은 공평하고 무던하게 흘러가고 있다. 

 

그렇다!  천리길 달려 외딴 섬까지 더듬어 왔는데 뭐가 무서우랴. 일 되어 가는 대로, 물결치면 치는대로, 바람 불면 바람 부는대로, 운명이든 귀신놀음이든, 인위적 사고이든 나를 디디고 지나가라. 나는 언제 어디서나 온전하다. 내 영혼은 더욱  단단해지고 있다.  세탁기가 왜 겁없이 튀냐? 대체 어떤 연유인가. 그것을 알고 싶다. 나는 어쩔 수없이 밤바다로 나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