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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려고 누웠는데

능엄주 2021. 6. 28. 01:06

잠자려고 누웠는데

 

밤 12시, 이른 시간이 아니다. 잠자려고 누웠는데 몸이 막 아파지기 시작했다. 진즉에 아파 있었는데 조용히 잠자려고 하니까 아픈 사실을 그제서야 인식한 것인가.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도 모르게 아픔이 머리꼭지에서부터 목으로 어깨로 허리로 내려오는 것 같았다. 가슴은 왜 이리 먹먹한가.

 

아파 아파 하는 사이 한 시간이 흘렀다. 밖에 비가 내리는가.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베란다로 나가 창밖을 내다본다. 비 온 흔적은 있지만 비가 내리지는 않았다. 비도 아니라면 내 수면을 방해하는 것은 그럼 무엇인가. 방충망을 뚫고 들어와 집단으로 공격하는, 모기 축에 들지도 못하는 먼지보다 더 작은 날파리 때문일까. 윙! 하고 날아오는 기척도 없이 얼굴에서도 가장 민감한 부분, 눈밑을 주로 물어뜯는 이놈들일까. 방으로 들어와 어둠속에서 조금 더 뒤채다가 하는 수없이 불을 켰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매일이다시피 내 집에 도착하는 책을 골라 읽어야 할까. 온집안에, 아들이 머물던 방에 책이 쌓여 있다. 꼭 읽어야 하는 책. 읽고 싶은 책, 광화문 교보문고에 나가서 내가 사온 책들도 있다.  책을 읽기에는 내 목이 감당이 안된다. 치료 그만큼 했는데도 치료받은 그날뿐, 근본적으로 나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처음 받아보는 추나 진료로 내 긴 목을 더 잡아 뺀 것인가. 병주고 약주고였나. 조금만 고개를 숙여도 목이 신음하고 고통을 호소한다.

 

모니터를 대형으로 바꾸어서 글씨가 14포인트로 많이 크다. 굳이 머리 숙이지 않아도 잘 볼 수 있다. 더구나 요즘은 작업을 놓고 있으니 내 작업으로해서 아픈 목은 아니라고 본다. 작업은 고사하고 끼니조차도 제대로 찾아먹지 않고 있다. 그야말로 만사휴의萬事休矣. 사는 맛이 없다.

 

멀리 떠나보는 건 어떨까. 두루 다 아픈 현실에서 멀어지는 것, 복잡한 사념에서 탈피하는 것, 전혀 생소한 환경에 처해 보는 것,  노트 북 앞에서 온갖 궁리를 다한다. 이럴 때 나는 생시의 아버지가 그립다.

"너! 또 어디 가고 싶은 거지?"

아버지는 어쩌면 내 심정을 그리 잘 간파하시는지 매번 내 입에서 감탄이 터져 나오게 된다.

 

함박눈이 퍼붓는 날이었다. 나는 무궁화호 기차를 타고 동해바다로 달려갔다. 다른 형제들 몰래 아버지가 내 코트 주머니에 은밀하게 찔러준 용돈은 대개 그런 용도로 쓰였다. 아버지는 내 마음을 거울에 비춰본 듯이 잘 파악하셨다. 아마도 나의 [마흔넷의 반란] 3권 집필 계획은 그 때 이미 내 영혼 깊은 곳에서 싹트고 있었을까.  남청색으로, 코발트로 빛나는 동해 바닷가 바위에 걸터앉아 청둥오리의 자유로운 유영을 바라보며 내 뇌리에 종횡무진 소설이 쓰여졌는지도 혹 모른다. 

 

이처럼 시시때때로 아버지를 그리워하게 될 줄 미처 알지 못했다. 코로나19 기세가 다소라도 뜸해지면 대청호 언덕 부모님 산소에 한 번 다녀오고 싶다. 월례행사처럼 매달 1회씩 다녀오던 산소를 멧돼지 출현에 겁을 내고, 18회를 마지막으로 가지 않은지 꽤 오래 되었다. 솔향기 난만한 가운데 엉컹퀴와 산나리꽃이 활짝 핀 대청호 언덕을 그리며 다시 잠을 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