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리와 의무
의리와 의무
엄마는 날마다 뭘 그렇게 열심히 해? TV 보고 노래도 부르면서, 밥도 제시간에 챙겨먹고 좀 쉬어! 엄마 노래 잘 하잖아. 컴퓨터 켜지 마! 지겹지도 않어? 글도 쓰지마. 힘들어! 내가 동화를 써보니까 글 쓰는 거 너무 힘들더라. 나는 엄마처럼 오래 못 배겨. 공부체질 못돼. 편하게 살거야.
그렇게 보였던가. 미련하고 융통성 없는 바보처럼!
史由 너가 그렇게 말 하지 않아도 나는 다 알고 있어. 내가 얼마나 답답하고 재미없는 삶을 살고 있는 줄을,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어. 내가 왜 모를까. 일종의 불안신경증일까. 아니면 컴퓨터 중독인가. 밖에 나갈 줄도 모르고 우거지국만 먹으면서 연어사러 마트에도 잘 나가지 않는 것, 그게 다 무지몽매도 아니면서 매일 반복되는 내 일과라는 것을.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천형天刑의 고문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만이 내 생명을 지탱하는, 내 삶을 견디게 하는 유일한 의무라고. 나 자신에 대한 의리라고.
어릴 때 우리 어머니는 조그만 밥상 끌어안고 글을 쓰고 있는 나를 보면 상 째 번쩍 들어서 마당으로 내던졌다고. 계집애가 허구헌날 책이나 붙들고 앉았다고. 던진 것으로 끝이 아니고 거기에 성냥불을 그었어. 마당 한 복판에서 내 꿈이 활활 다 타버렸어. 소녀의 소박한 꿈이 담긴 노트와 원고지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감수성은 어림도없지. 얼마나 진솔하고 풋풋한 내용이었던가. 너무 오랜 일이라 기억이 희미해졌지만 감성! 그래! 때묻지 않은 말갛고 투명한 순수청정한 감성이 그것들 속에 내장되어 있었다는 진실 말이다.
반항이었을까. 오기였을까. 컴퓨터에 앉지 않으면 마치 인생의 의무, 과제를 저버린 듯, 나와의 약속, 의리와 신의까지 저버린다고 여겼던 것일까. 대체 그 누가 나에게 이처럼 가혹하고 잔인한 의무를 부여한 것일까. 대체 누가 나에게 태어날 때부터 부과된 자신에 대한 의리를 지키도록 종용하였던 것인가.
그러나 요즘 내가 주야로 집중하고 있는 것은 의무와 의리 두 조건에 다 해당하는 중요한 글쓰기이다. 치과 예약을 계속 연기하면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오늘 아침은 정말 고통이 너무 심해서 잠을 일찍 깨버렸다. 거울을 보니 내가 나가 아니야. 나가 너도 아니야. 전혀 모르는 얼굴처럼 뜨악하게 바라보았어. 오랜 집콕때문에 살이 붙었다면 보아줄 만 할까. 그도저도 아니고 그냥 무너져 내린 처참한 형상이었어.
나는 의무와 의리 두개 종목을 잘 이수해야만 해. 이 모양 이 몰골이지만 음으로 양으로 나는 은혜를 입은 거라고. 나는 이 기회에 또 한계단 높게 상승하는 거라고. 지금 미련이니 답답이니를 한가하게 논할 때가 아니야. 나는 응분의 가치를 창출해야 해. 그리고 그들이 빛나듯, 내가 땀띠 얼굴을 북북 피나게 긁으면서, 연고를 덕지덕지 바르고서 쓴 이 글이 세상천지 만백성에게로 눈부시게 떨쳐나가야 해. 사유! 너는 6.25 한국전쟁의 피바람도 모르면서 나에 대해서 알면 뭘 알아? 나도 나를 잘 모르는데. 너의 인생관과는 구별조차 할 수없는 게 내 실재實在란 말이다.
엄중한 의무와 의리의 소임을 다하면 나에게는 새로운 태양이 비칠 거라고. 미련하지도 답답하지도 않은 영광스런 나의 찬란한 태양. 내마음은 벌써부터 남해의 매화향기를 그리고 있어. 그러니 입 다물어라. 그 시대 공부도 좀 했다는 나의 어머니. 내 어머니처럼 밥상을 메치지 말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