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과학
마음 과학
수 년 전 애들 엄마가 하늘 나라 가고 나서 처음 맞이한 그 해 봄.
우리집 근처로 이사한 두 애들을 데리고 금강경 동산에 갔다. 엄마의 처절한 죽음을 겪은 6살, 8살, 두 녀석이 마음을 못잡고 헤맬 때였다. 거기 가면 각종 들꽃이 피어나고 연못에는 개구리 두꺼비도 있을 것이었다. 어찌하든지 그들이 무엇에든 흥미를 가져주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녀석들은 잠도 안 자고 밥도 잘 먹지 않았다. 창문 틈에 끼어 나오지도 들어가지도 못하고 푸드덕거리는 날벌레처럼 동서 좌우로 왔다갔다 하면서 잠시도 안정을 취하지 못했다.
"개구리다! 왕개구리야!"
연못에 먼저 내려간 작은 녀석이 개구리가 나타났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가 얼마나 우렁차던지, 어쩌면 인근의 산 메아리가 듣고, 같이 소리를 질렀는가 싶게, 작은 녀석의 목소리는 멀리까지 울려퍼졌다. 그때 법당에서는 이른바 마음 과학이라는 금강경 강의가 진행 중이었다. K법사님의 금강경 강의는 논리가 무척 간단하면서 평이했다고 할까. 어려운 일이 닥치면 어려운대로, 기쁜 일이 발생하면 기쁨 그대로, 미움과 갈등으로 괴로우면 괴로운대로, 그것을 몽땅 부처님께 바치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고 한다. 그런저런 문제를 끌어안고 있지 말고 그때마다 부처님께 바치면 만사가 해결되는 경이로움을 체험하게 된다는 명쾌한 이론이었다.
K법사님이 강조하는 '바친다' 의 의미는 문제를 나로부터 내려놓는다. 강력한 어떤 힘(지혜로운 깨달음, 선지식)에게 이입移入한다. 혹은 삶의 과정에서 부닥치는 온갖 걱정근심을 객관화 시켜서 거리를 둔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꽤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여겼다. 어렵지 않았다. 무조건 '주시옵소서! 믿습니다. 믿으니까 신께서 알아서 처리해주옵소서' 의 수동적 자세가 아니었다. 삶의 주체인 내가 능력자라는 인식을 전제로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해법도 발견된다는 이치같았다.
珉河야! 쉿! 조용히 해! 개구리 놀라겠다. 나는 개구리 보다도 법당에서 공부하고 있는 사람들이 염려되었다. 민하의 목청이 너무나 우렁찬 것이 한 편 든든하면서도 장소와 시간이 합당하지 않은 때문이었다.
나는 작은 녀석의 이름을 연신 불렀다. 그애의 고성을 제지 시키는 내 목소리도 법당에서 금강경 강의에 열중하는 분들에게 방해가 될까싶어 소리를 작게 내려고 조심했다.
민하가 발견한 개구리는 아침 산책나왔다가 깜짝 놀랐을까? 민하의 고성에 놀라 도망을 갔는가. 개구리는 연못가 바위 어디에도, 풀잎 위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개구리 언제 나오지?"
潤이가 물었다. 개구리 따위는 관심도 없다는 표정이더니 윤이도 연못가로 내려왔다.
"쉿! 조용!"
내가 주의를 주자 민하와 윤이가 연못가 바위에 쪼그리고 앉았다. 연못물은 고요했다. 오분 십분 시간이 흘렀고, 연못의 고요는 지속되었다. 개구리의 출현을 기다리는 두 녀석의 긴장된 자세에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개구리를 보고싶은 녀석들의 간절한 마음, 마음 먹은 대로 된다는 금강경의 마음 과학이 움직인 결과일까. 윤이와 민하의 일요일은 모처럼 안정 모드로 변환되는 모양새였다.
개구리 고마워!
나는 마음속으로 금강경 동산 작은 연못에 사는 개구리에게 고마움을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