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글쟁이 몇은 임원선거에 등록이나 출마를 선언한 일 없으면서 공연히 아이들처럼 들떠 있었던 것 같다. 몇 년만에 한 번씩 있는 대통령 선거라든가 지방자치단체 선거가 있을 때도 단 한 번도 가슴이 설레거나 두근두근한 일은 전무했다. TV나 일간지에서 후보로 나온 사람들 면면을 검토할 때도 그냥 무덤덤이었다. 국민된 의무와 권리를 강조하는 세태에 떠밀려 자의반 타의반 투표장에 나가곤 했던 거였다.
그런데 확연히 달랐다. 이날 비로서 달라진 걸 감지한 게 아니라 선거가 있기 얼마 전부터 주변에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고 함이 맞는 말이다. 평소에 소원했던 사람들이 한 표를 부탁하는 전화, 메시지, 이메일이 아침에 낮에 저녁에 어느 날은 한 밤중에도 왔다. 또는 후보의 인적사항을 묻는다든지, 누구를 찍어야 하느냐는 등, 개중에는 내가 추천해주는 사람을 찍을테니 이름을 불러달라는 주문도 멀리 지방에서까지 심심찮게 이어졌다. 바야흐로 소설가들의 임원선거 날이 임박한 것이다.
웃기는 일은 그동안 늦공부 하느라고 일체 어떤 모임이나 세미나에 불참했던 나에게 한 표를 주겠다는 거룩한 동지들이 출현하여 우울 1기 증상을 앓고 있는 나를 감동시켰다. 6.25를 소재로 쓴 내 소설을 읽었다면서 중도파인 내가 임원이 되어서 협회를 평화스럽게 이끌어가야 한다고 기함을 토했다. 중도파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어떻게 나를 중도파라고 규정지을 수 있었는지, 그 기준을 어디에 두었는지 그것을 캐물을 필요를 느끼지는 않았지만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나는 오랫동안 중도파, 과격파, K 지誌파, 보수파고 간에 어디에도 끼어들을 엄두도 못냈으며, 본래 내코가 석 자여서 늘 허둥거리느라 임원이고 이사고 관심밖이었다. 타고나기를 뭐든 한 가지에 빠지면 두 가지를 넘보지 못하는 성미인데다 그 한 가지조차도 마무리를 실하게 맺지 못한 판국에 제대로 글쟁이 사명이나 다 할 수 있었던가 부끄러울 뿐이었다.
가슴이 설레고 두근두근한 것은 열여섯 여고 일학년 때 앞집 사는 청고생 영일이한테 첫사랑 고백을 듣던 그 시절에 한정할 뿐, 세상살이에 지쳐있는 작금의 내 심경으로는 웬만한 일로 도대체가 설렌다거나 두근두근이라는 어휘는 당치도 않았다. 하지만 충무로역에서 두 어차례 세미나가서 룸메이트로 하룻밤에 만리성 쌓듯, 돈독한 우정을 맺은 동료 글쟁이들을 만나자 내 둔한 감성은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오랫만에 동료들을 만나니 기쁨이 솟았고 이야기가 콸콸 쏟아져 나왔다. 남산으로 가는 도중 찬바람도 합세해서 우리는 씩씩하게 투표장으로 걸어가 입후보자들과 정중하게 악수를 했다. 출마한 남자분들은 좋은 양복에 넥타이를 단정히 맸고,, 여자분들은 동지섣달에 스카트로 폼잡고 저마다 점잖음과 위엄을 띤 표정으로 우리들에게 한 표를 호소했다.
우리들은 평소에 잘 만날 수 없던 어르신들, 신문지상에서나 뵐 수 있던 저명작가 선생님들이 계셔 앞으로 나아가 인사 드리고 하는 사이에도 여전히 가슴의 두근거림과 설레임은 멈추지 않았다. 어쩌면 가슴 설레임과 두근거림은 이번 임원선거와는 무관한 것이 아닐까. 적어도 시원시원한 뱃포를 가진 여자소설가들과 어울려 <문학의집.서울> 로 올라오는 동안 내 가슴 속에 가만히 깃든 설레임이라든가 두근거림 같은 감정은 깨끗히 사라져 주어야 옳았다.
투표용지를 받아들자 미리 적어가지고 온 10명의 후보자 이름자를 써넣고 우리는 ' 2009소설문학' 수상자가 베푸는 뒷풀이에 참석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
설레임의 정체는 거기 그 자리에서 선명하게 판명되었다. 1983년의 일들이 호프와 강냉이 접시 그리고 가스불에 구은 노가리 한 쪽에 겨울나무에 눈꽃피듯 고요히 펴오르고 있었다.
"집에가서 빨래나 하지!"
"장사나 열심히 해"
으짓잖게 소설숙제를 해가면 인정사정없이 툇자를 놓고, 과격한 독설?을 서슴치 않던 L선생님이 그 장소에 계시지 아니한가. 나는 그 선생님을 보는 순간 설레임과 두근거림이 겨우 진정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아마도 L선생님을 뵌 순간 더 간크게 무장을 단단히 했던 이유인지 모른다.
L선생님이 나에게 노가리 한 쪽을, 그리고 함께간 동료들에게 호프를 권했다. 그때의 뼈아픈 기억을 털어놓는 우리들에게 L선생님은 "허허허" 하고 웃으실 뿐 그 자리는 모처럼 스승 제자의 격의 없이 화기가 넘쳤다. 모두들 공정한 선거를 잘 치룬 것이 감사하고, 모이다 보니 공교롭게도 옛날 그 제자들이어서 선생님은 흐뭇하신 듯했다. 그 저녁 L선생님이 나에게 집어준 노가리 한 쪽은 집에 오는 내내 내 가슴을 설레임이나 두근거림 대신 훈훈함으로 덮여주었다.
"내가 알고 있지. 다 그렇게 작가가 되어가는 거야"
그렇다. 작가가 된 것이 아니라 되어가는 것, 되어지고 있는 과정이 아닌가. L선생님이 건네주던 노가리 한 쪽이 더 없이 소중하게 여겨지는 밤이었다.
| 임재문 | 10-01-31 03:53 |  | 내가 좋아하는 주현미 노래 어허라 사랑에 "어라 어허라 눈물이된 사랑 노가리 너덧축은 죽어나겠네" 하는 대목이 있는데 그 사연인즉은 노가리 안주로 술을 마셔 노가리 너덧축은 죽어나겠다는 내용입니다. 노가리 씹으며, 그렇게 인생을 반추해보는 것도 별미라 생각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ㅎㅎㅎㅎ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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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영희 | 10-02-01 11:50 |  | 귀뚜라미 한 마리 늦은 가을 방문 틈으로 뛰어들어온 귀뚜라미 한 마리. 장롱 뒤에 몸을 숨기고 어둔 밤을 구성지게 울어주던 새끼귀뚜라미. 나는 그 귀뚜라미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귀뚜라미 노래를 불렀답니다.
귀뚜라미 또르또르 책을 읽는다 가을이라 깊은 밤 달이 밝은데 귀뚜라미 또르또르 책을 읽는다
임재문선생님 제글 읽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왕송호수로 우리 언제 갑니까? textare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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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화 | 10-02-01 23:48 |  | 변영희 선생님, 그 당시에는 죽을 만큼 심각하던 일들도 세월이 흐르면 노가리 한 쪽 처럼 정겹고 소중하다는 말씀이 마음에 깊이 와닿습니다. 30대 때 선생님의 소설 '마흔 넷의 반란'을 읽은 것이 엊그제 같은데 저도 벌써 그 나이를 훌쩍 넘어섰습니다. ㅎㅎㅎ... 노가리 한 쪽이 금쪽 같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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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영희 | 10-02-03 10:16 |  | 처음 느낌 그대로
사람이나 사물을 처음 만날 때 첫 느낌. 즉석에서 감지되는 어떤 感. 그게 현재까지 그대로 이어지는 걸 보면 '첫 인상' 의 중요성은 더 거론할 필요가 없어보이고.... 적어도 나의 투시력? 관찰력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 무슨 말이냐고요?
노가리에 대한 해석도 그리고 <마흔넷의 반란> 도 요. 진심으로 고마움 전합니다. 조용한 자리 빌리고 싶을 만큼 말이 잘 통할 듯 싶기도. 어느덧 음력설이 돌아오니 손님맞을 준비. 시장 마트 백화점 돌며 먹이사냥. 늘 좋은 날 되시기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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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0-02-04 22:58 |  | 변영희선생님, 그날 L 선생님이 하신 그 말씀, " 내가 알고 있지, 다 그렇게 작가가 되어가는 거야." 저는 지금 그 말을 노가리처럼 씹으며 맥주잔을 기우리고 있습니다. 그렇겠지요. 그런 세월보내며 그런 선생님 모시며 글을 배우고 썼던 독한 그 날들이 그리워지는 밤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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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영희 | 10-02-05 08:57 |  | 일등에 대한 향수 기왕 등록금내고 학교 다니는 건데 일등 한 번 해보면 얼마나 좋은가. 기왕 피터지게 날밤 새우며 공부하는 건데 왜 통과 못해? 손목이 저리고 시력이 다 나가도록 자판 두들겼는데 세상을 번쩍 들었다 놀만큼 멋진 작품 왜 못써? 한 편에서는 '묵묵히 가라. 가고 또 가는 것이다. 집중해서....' 간절한 소원은 바람이 등을 밀어 준다지요. 그 바람에 희망을 걸어보면서 2010년을 출발합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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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복희 | 10-02-10 09:44 |  | 두 번 세 번 읽으며 이제야 흔적 남깁니다. 컴 앞에 앉으면 의례 한 번 열어보는 곳 작품을 읽다가 댓글 못 달고 다른 일이 생길 경우 아니면 그냥 읽고 말 때가 있지요.
늘 좋은 글 쓰시는 변선생님 존경합니다. 행복한 설 보내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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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영희 | 10-02-10 11:58 |  | 시어머니 요리실습기간 설날이 다가오는 것은 시어머니 요리실습 품평회 열리는 날이라는 의미. 바야흐로 가사노동주간을 맞이하여 할일 쌓였는데 무엇부터 해야할지 뒤숭숭. 책상에는 1.동업자들(시인 수필가 소설가)의 책 읽을 것 수두룩. 2.무식함을 벗어나려 사다놓은 철학서적 3. 꼭두새벽에 읽는 경전 4..단편소설 2편 수정할 일.오늘도 지각생은 바삐 뛰어다닌다오.그래도 힘이 솟는 것은 그대 최복희 선생님과 만나는 일이라.하하하. 고마워요. 바쁘신데 댓글 남겨주셔서요. 설 명절 잘 보내시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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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자인 | 10-02-11 18:38 |  | 변영희 선생님, 물 흐르듯 써내려가신 노가리 한 쪽 잘 읽었습니다. "내가 알고 있지. 다 그렇게 작가가 되어가는 거야" 라는 L 선생님 말씀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이런저런 모임들로 바쁘실 텐데, 늘 공부하시는 선생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요즘은 바쁘다는 핑계로 댓글을 잘 달지 못했어요.선생님, 설 명절 잘 지내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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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영희 | 10-02-11 20:04 |  | 나는 순전히 내 힘 내 실력으로 좋은 학교에 들어갔고 月灘박종화 선생님으로부터 싸가지 있다는 말씀도 들었어요. 그때 써낸 글 지금도 기억해요. 그 학교 말고도 집안 사정상 다른 학교 두군데 더 옮겨다녔는데 동숭동 국립방송통신대학교 만한 학교는 또 없는 것 같아요.교수진, 강의자료와 교수방법 스터디그룹, 학우애, 그리고 20강 다 채우는 학교 거의 없잖아요. 김자인 선생님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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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철 | 10-02-11 21:12 |  | 어제 중국에서 들어와서 노가리 한쪽 먹었네요~ ㅎㅎ 노가리가 맛대가리는 없어도 씹는 재미는 있어요. 특히 맥주 안주로는 살안찌고 좋지요.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그나 저나 변선생님 여고 시절 사랑을 고백했다던 영일이가 혹시 내가 잘아는 김영일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드네요~ ㅎㅎ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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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영희 | 10-02-12 18:03 |  | 친선사절단? 이 다녀가셨군요. 설날이라고 지지고 볶고 열중하다가 백성들이 설 준비를 잘 하고 있나 민정시찰? 겸 외출했다 오는 길. 눈발은 시나브로 날리고 아이들 어른 모두 돈쓰며 즐거운 날. 한 편으론 후원금 줄어들고 자원봉사자는 설쇠러 가 노숙자들 굶게 생겼다고 해 무거운 마음. 이 무력한 백수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담. 선생님 감사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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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희승 | 10-02-12 14:30 |  | 노가리를 앞에 놓고 맥주를 홀짝러리던 시절이 그립습니다. 술을 끊어버려서 삶에서 어떤 취기, 도취가 사라져버렸습니다. 몽롱한 가운데 혀 꼬부라진 소리를 해가며 속내를 털어놓곤 하였는데. 그런것 같습니다. 작가는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명검은 벼리고 담금질하는 혹독한 과정을 거쳐 탄생하지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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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영희 | 10-02-12 18:20 |  | 선생님. 똑 끊지는 마시고 혀 안 꼬부라질 정도로만 마신다면. 두 아들한테는 술은 마약이다 라고 말하는데 그러나 문사들에게 술은 때로 활력소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취해서 시 한수 쯤 읊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같은 것. 선생님 감사합니다. 설날 행복하시고 좋은 꿈 꾸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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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식 | 10-02-17 07:07 |  | 변영희선생님의 글을 읽으면 누구보다 작품을 쓰시며 신열을 많이 앓으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열정이 가득하시기에 문제작을 써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노가리 말씀을 하시니 주현미 노래가 문득 생각나는군요. 양인자 선생은 의미와 감칠맛이 있는 노래가사를 잘 쓰시는 것 같더군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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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영희 | 10-02-17 16:26 |  | 우표가 되고 싶다
가끔 나는 우표가 된다 아버지 등에 엎혀 먼 꿈나라로 여행을 떠난다 곱게 봉한 편지 등에 엎혀 아주 멀리 날아간다 숱한 비밀을 담고 또한 보고픔을 담고 이름을 꼭꼭 눌러담은 편지로 영원을 가고 싶다 우표를 늘어놓고 받을 사람의 얼굴 떠올리며 고르다가 어느새 편지봉투에 매달려 높디높은 창공을 꿈으로 난다
박종숙시집 <내 발끝엔 빨간 불이>에서
임병식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신열, 열정은? 왼종일 놀이에 팔려있다 어둑해서 숙제걱정하며 집에 돌아온 아이처럼 그냥 절절매고 있습니다. 왜그리 할 일이 많은지, 후유~입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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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보 | 10-02-18 19:31 |  | 지난날의 선생님과의 만남에서의 분위기가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노가리 한 쪽'. 문명히 음식의 한 종류 같은데 사전을 찾아보니 '散播'. 산파를 찾아보니 '씨를 흩어 뿌리는 일'이라고 나와 있군요. 얼핏 '북어포'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맞는지요. 잘 읽고 갑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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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영희 | 10-02-18 20:39 |  | 선생님, 맥주마시면서 뜯어먹는 조금 값이 싼 안주를 말해요.북어보다 더 죄끄만 게 맛은 별로구요 정진철 선생님 말씀으로는 씹는 맛이랍니다. 지갑이 약간 허술할 때 호프집에 가면 공짜로 옥수수강냉이 한 접시는 그냥 나오구요. 아마도 노가리는 돈을 내는 것 같거든요. 여럿이 흥이 나서 맥주잔 기우리다보면 그 보잘것 없는 노가리가 제법 구실을 한다구요.분위기 때문일 겁니다. 서울 오시면 연탄불에 구운 노가리 한 접시 대접해 드릴까요? 하하하. 고맙습니다. 조선일보에서 조용헌살롱 몽땅 읽고 있다가 ....들어오게 되었네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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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보 | 10-02-19 23:50 |  | 선생님을 만나 뵙기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노가리 한 접시를 위해서라도 꼭 만나뵙고 싶습니다. 노가리 접시 말고도 맥주나 소주도 곁들여 졌으면 좋겠습니다. 연탄불. 겨울이었으면 더 어울리겠지만 한 여름이라도 연탄불이 있는 그런 분위기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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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영희 | 10-02-23 03:34 |  | 선생님 연탄불로 구워내는 노가리가 있던가 저도 잘 몰라요. 요즘은 다들 편하게 가스를 이용하니까요. 노가리도 좋지만 동대문시장 노점에서 녹두빈대떡 먹는 맛도 수수하답니다. 그런데 노점상 일제 단속인지 근래에는 그 서민적인 정취가 슬슬 자취를 감춘다고 하네요. 선생님 고맙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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