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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몽롱하다/변영희

능엄주 2020. 1. 12. 13:14

몇 차례 나를 진료한 닥터가 방학 중 여행을 떠난 것인가.  거의 두 달이나 기다려야 재진이 가능하다고 했다.

약이 떨어졌다. 그 약을 두 달 가까이 복용하므로 무엇이 좋아지고 개선되었는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습관처럼 복용하던 약을 중단하자 조금 불안해졌다.


몇 달 전 아침 잠이 깨어 거실로 나오자마자 쓰러진 일. 홀연 회오리바람에 휘말리듯 어떻게도 해볼 수가 없이 순식간에 고꾸라진 것이다.

간신이 소파를 붙잡아 바닥에 나가떨어지는 불행은 면했으나 걷잡을 수 없는 어지럼증은  가히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만약 거리에서 넘어졌다면 어떠했을까. 시멘트 바닥에 머리를 부딪혀 졸도하지는 않았을까.


집 밖에만 나가면 지뢰밭이라는 기사를 언젠가 읽은 일이 있다. 울퉁불퉁 튕겨져 나온 깨어진 보도블럭. 움푹 패인 곳, 비가 오면  어디로 내려가지도 스며들지도 않고 고여있는 물이 그렇다. 겨울 찬바람에 아이스 블랙을 만들어 차도 사람도 사고를 당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나도 두어 차례 길바닥에 나가떨어진 일이 있다.  그때는 어지럽지는 않았다. 퉁겨져나온 보도블럭에 걸려 넘어진 것, 원인이 분명했다.


그런데 집에서 잠자고 일어나 방 밖으로 나오는 순간 천지가 빙글빙글 돌다니, 아니 도는 건 천지가 아니라 우리집이었고 내 몸이었다. 천지도 바람도 아닌 바로 나의 극심한 어지럼증이었다. 단 몇 초, 몇 분에 불과했지만 공포심이 컸다. 차일피일 하다가 이비인후과를 갔다. 이비인후과를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병원에 진료받으러 가서 증상을 말하고 안내받은 것이다. 가자마자 닥터로부터 10가지에 이르는 까다로운 검사를 처방받았다.  검사받는데 일주일을 대기했고 검사 받고나서 다시 대기했다가 처벙받아온 약이 혈액순환개선제였다.


의사가 병원에 복귀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해당과의 간호사 조언을 따라 약국에 가서 약을 사왔다. 약값도 만만치 않았다. 약을 사거나 병원에 갈 때마다 나는 자책감에 빠진다. 평소에 내 몸 내가 돌보지 않고 소홀하다가 병원과 약에 의존하는 게 부끄럽기 때문이다.


책상에 오래 앉아 작업하다보면 뇌가 오그라드는 것 같고,  뒷통수에 서늘하게 피가 내리고 소름이 돋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뜻대로 무슨 일이 안 풀릴 때는 머리에 후꾼 열이 나고, 땀이 척척하게 흐르면서 폭 지친다. 주변의 지인들이 류마치스 관절염이다, 폐암이다, 백혈병 등을 앓고 있다는 소식도 듣고 있다. 병을 친구 심으라는 말도 있다.


몸의 증상보다  불안 심리가 더 큰 것같다. 아직도 해야 할 숙제가 남아 있기 때문일까.  B 선생님은 이승에서의 숙제를 다 못해서 저승사자가 나에게로 와서 그냥 돌아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말이 무슨 말인가? 그날 아침 회오리바람에 휘둘린 게 아니라 저승사자였던가. 그날의 어지럼증에 대해 나는 그저 몽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