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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오자 /변영희

능엄주 2019. 12. 10. 03:12

집에 돌아오자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내가 이처럼 피곤한데 B선생님은 어떠셨을까. 선생님을 배려하지 않은 것 같아 송구하기 이를 데가 없다.


오고가는 시간만 네다섯시간이었다. 전에는 B선생님을 뵐 수 있다는 것만 생각하느라 먼 줄 모르고 한 달음에 달려갔다.

오늘은 달랐다. 자발적인 외출이 아니어서일까. 잔뜩 흐린 날씨 탓일까. 눈이 올 것 같아 우산까지 챙겨들고 집을 나서는데 몸이 무거웠다.

아들의 교통사고, 그리고 막내 여동생 사망 이후 궁여지책으로, 어쩌면 최선의 선택으로  조계사  동안거 합동 천도재에 동참, 기도를 울려놓았다. 또 자정子正에 적게는 1시간, 어떤 날은 3시간여 집에서 지장경 기도를 시작, 일주일 후면 49일 천도재를 회향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내 나이 열아홉살 때 가정교사로 들어간 집에서 처음 알게 된, 헌 책방에서 빌려다 보는 문예지, 잡지에서였다. 계모 밑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학교 성적이 매우 저조한 초등학생을 지도하는 명분이었지만 과목 공부보다 그 아이에게 누나가 되는 일이 더 버거웠다. 스스로에게 용기를 부어주는 일, 나자신부터 희망과 활력을 유지하는 게 필요하다고 여겼을까. 틈만 나면 헌 책방으로 달려가서 여러 종류의 책을 빌려오곤 했다. 밤늦게까지  읽은 다음 소위 독자투고를 하는 것이다. 등록금을 해결해야 하는 무거운 과제를 글쓰기로 희석시키려 했던가. 무엇인가를 열심히 썼다. 


독자와 심사위원이란 관계로 인연을 맺게 된 분이었다. 얼마후 문단 말석에 이름을 붙여놓은 후 정식으로 선배문인, 스승으로 자리매김이 된 분, 오로지 창작의 길로만 달려오신 참으로 올곧은 분이었다. 90이 넘은 연세에도 여성스럽고 품위있는 모습에 거듭 감탄, 존경스러웠다.


자정子正 기도를 끝내고 나니 창밖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흐린 날씨때문에 B선생님도 전번과는 달리 고단해보이셨던 것일까.

겨우 평양냉면 한 그릇 대접하고 장시간 이야기 장단을 펼쳤으니, 미련하고 미련했다. 말을 오래 하는 것이 반드시 우의를 다지거나 신뢰를 구축하는 방법은 아닌데 커피솦에 너무 오래 머문 것이다.


타인을 배려하지 않은 이기적인 시간을 만든 건 실수였다.

행여 감기는 들지 않으셨는지?,날이 밝으면 전화라도 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