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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아싸`가 밀레니얼을 만나면/매일경/김은혜 MBN 앵커·특임이사/변영희 퍼옴

능엄주 2019. 6. 16. 13:05

매일경제


  우리가 결승에 올라가서 그렇지, 23세 이상 성인 축구를 '진정한' 축구로 보는 스포츠계에서 20세 이하 월드컵은 상대적으로 관심이 떨어져 있었다. 출국 전 기자회견. "목표가 무엇입니까?" "우승입니다"(이강인)라고 해도 '그러네, 역시! 청소년. 그래, 꿈은 크게 꿔야지.' 정도에서 나아가지 않았다. 유소년과 청소년 축구는 축구 이전에 체육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번외경기를 보는 관조적 3인칭 관찰자 시점이라고나 할까.

감독 정정용에 대해선 '푸근한 옆집 아저씨처럼 보이는 그분?' 심성 고운 리더를 먼저 떠올린다. 축구협회 소속으로 어린아이들만 10년 이상 맡아 왔다 하니 '아, 붙박이 선생님이셨겠구나…'. 감독이라 쓰고 교사로 읽는다. 사실 보다 정확히는, 그를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이력을 봐도 요즘 말로 아싸(아웃사이더)로 분류되는 분. 축구 인맥의 '정혈'인 연·고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대표 선수 한번 해본 것도 아니며 골절로 선수생활을 접어 축구 아닌 길도 걸어봤던 사람이니 겹겹의 무명 생활, 들춰보려던 사람이 많지 않았고 그의 장도를 비상하게 보는 시선도 드물기가 매한가지였다. 그런데 우리 생애 한번 볼까 말까 하다는 사상 최초 결승 진출. 관제의 향기를 뺀 '국풍 80'의 재연이 웬 말인가. 그냥 '꾸역꾸역' 올라왔다는 정 감독이 구사하는 언어 속에선 담금질이 묻어난다. 어떻게 준비해온 걸까, 궁금해졌다.

이승우 선수가 참 좋아하는 지도자도 정정용 감독이라 들었다. 어렴풋이 이유를 알 것 같다. 능력이 있어도 '튀는 스타일'이면 팀의 이름으로, 데친 시금치 같은 시련의 과정을 거치게 하는 게 우리 풍토였다. 정 감독은 그런데 들어보면 성격이든 나이든 실력차든 '팀에' 맞추지 않고 '팀이' 맞춰주도록 다 끌어안은 듯하다. 그늘 생기지 않게 버무리기. 조직력이란 잔디 위 파이팅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라커룸에서 시작되는 법. 펴진 자존심에서 신뢰가, 창의력 있는 플레이가 나오지 않던가. 모두 원팀. 그래서인지 경기가 끝나면 수훈갑 선수들, 마치 녹음기 틀 듯 함께 뛰지 못한 동료 덕에 이겼다고 입 모아 강조한다.

리더십은 심리전이다. 훈련이란 인내를 근육 속에 체화시키는 것. 어린 선수들에게 때를 기다리고 단련하라고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어른들은 다 안다. 그래서 쉽게 풀어 전달하는 듯하다. 게임 브롤에서 볼 법한 '정복자의 심정으로 폴란드의 땅(시합장소) 밟기' 주문. 실제 경기에선 함정도 파고 상대를 골짜기로 몰아 우리 공간을 창출하는 전술로 실행된다. 즐기며 땅을 차지하기. 그러고 보면 축구 아닌 세상에서 축구를 보며 살아온 사람이 아니었나 싶다. 정 감독도 기다린 세월이 있다고 들었다. 원서만 내면 알아서 학위 주는 과정 말고 진짜 생리학 박사 과정을 밟았다는데…. 그래서 체력 보강 처방전도 체리주스, 에너지젤, 과학으로 했던가. 공개된 것 외에 비책이 따로 더 있겠으나 선수들이 힘 빠지면 정신력 탓하던 과거는 그로 인해 완전히 잊혔다.

이쯤 되면 감독의 화려한 출사표, 어록이 나올 법도 한데 선수 소집부터 오늘까지 그의 입에서 '최선' 외에는, '우승'이나 호기로운 수치가 언급된 적이 없다. 오랜 '아싸'의 세월로 다진 신중함일까. 선수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이기라고 말하지 않고 추억과 경험을 쌓자고 권한다. "파주에 우리 사진이 걸리면 어떨까." 반드시 상대를 누르라고 지시하는 상명하복의 스포츠계에서 추어주고 독려하는 교육학 원론을 듣는 것 같다. 이기라고 강권한 것이 아니므로 게임은 죄책감을 받아낼 싸움이 아니게 된다. 지더라도 선수 탓이 아니다. 추억과 경험이 하나 덜해질 뿐이다. '너는 왜 내가 하던 것만큼 못하니.' 선수들을 위축되게 했던 일부 명감독들은 부끄러워해야 한다. 이제는 축구도 엘리트 시대가 아닌 밀레니얼 시대. 외딴 별 모아 은하수 만들고, 동감의 원심원 키워 기적의 흥을 일깨운 감독의 마지막 결전을 기다리려 한다. 결과는 중요치 않다. 역사는 이미 만들어졌으니.

출처 :네이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