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죽음’은 삶이 주는 마지막 선물/[이진숙의 접속! 미술과 문학] -24- 다니엘 페나크의 『몸의 일기』와 루치안 프로이트의 ‘어머니의 초상화
‘좋은 죽음’은 삶이 주는 마지막 선물[이진숙의 접속! 미술과 문학] -24- 다니엘 페나크의 『몸의 일기』와 루치안 프로이트의 ‘어머니의 초상화’![]() “울 엄마가 이렇게 날씬해질 줄은 몰랐어.” 막내 동생의 말에서 쓸쓸함이 묻어났다. 적당히 몸피가 있던 엄마는 늘 우리 세상의 당당한 일부였다. 그러던 엄마가 점점 작아지고 있다. 요양병원과 종합병원을 오가길 8년. 살이 다 빠지고, 뼈도 빠져나가 엄마는 아주 조그만 해져 그냥 사라질 것 같다. ‘선택을 해야 할지 모르니 마음의 준비를 하시고 미리 의논들 해놓아라’는 의사의 경고가 수차례 있었는데, 매번 감당할 수가 없다. 도대체 어떻게 자식이 부모의 목숨을 결정할 수 있단 말인가. 엄마는 자신이 노환과 치매가 왔을 경우 어떤 조처를 취하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엄마는 간절하게 살고 싶어한다는 것, 이것이 우리가 아는 전부다. 그러니 우리 여섯 형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엄마의 삶을 가능한 유지시키는 것뿐이다. 비록 그것이 아무 희망이 없는 일일지라도. 나에게 생명을 준 사람, 그 사람의 죽음은 잔인하고 더딘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다. 매일매일 조금씩 진행되는 기나긴 소멸이 갖는 지독한 산문성은 죽음의 육체적인 측면을 바라보게 한다. 다니엘 페나크의 소설 『몸의 일기』를 집어든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늙는다는 것은 몸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 것 소설의 주인공은 1923년생. 20대 때 나치 침범과 레지스탕스 활동 등 영웅이 될 만한 역사적 시대를 살았지만 그는 영혼, 정신, 위대함, 내적 성취 등 폼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몸, “우리의 길동무, 존재의 장치로서의 몸”이다. 12살 때부터 87세 노인이 되어 죽기까지 오직 몸에 관해 쓴 일기는 딸에게 남긴다. 여자야말로 남자의 몸에 무지한 존재니까. 성장한다는 것은 대소변 가리기, 들끓는 욕망을 적절히 해소하고 다스리기, 건강한 몸 가꾸기 등 몸에 대한 통제를 배워나가는 과정이며 반대로 늙는다는 것은 몸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지식인인 주인공은 73세에 전립선 수술로 4시간 간격으로 오줌주머니를 비워야 하는 ‘물시계’가 되었다. 늙어가는 사람의 지혜는 오줌주머니뿐만 아니라 “내 이명, 내 신트림, 내 불안증, 내 비출혈, 내 불면증” 같은 노쇠의 징후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조금씩 기능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몸은 통제의 대상이 아니라 “인생이라는 임대차 계약의 마지막 기간을 함께 살아”가는 동거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물론 노화에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다. 옛날 사진일 땐 오히려 금방 알아보는데, 최근 사진일수록 자기 얼굴은 더 못 알아보는 일이 생긴다. “몸 구석구석이 다 퇴화되고 있는데도 삶의 환희는 변함없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욕망의 생생함과 육체의 쇠락이라는 불균형은 노화를 더욱 슬프게 만드는 것이다. 노인의 마지막 소망은 좋은 죽음이다. 소설의 주인공도 더 이상 노쇠로 인한 육체적 고통을 겪지 않고 잠자듯 죽기를 소망한다. 좋은 죽음은 삶이 주는 마지막 선물일 것이다. 타인의 죽음이 나에게 남겨준 고통 프로이트의 그림은 이와는 본질적으로 거리가 멀다. 평론가 마틴 게이퍼드는 “노화나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프로이트 회화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프로이트 그림 속 인물 대부분은 침대나 소파에 널브러져 있다. 인체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는 고전적인 우아한 자세와는 거리가 먼 자세다. 영원한 청춘과 초월적인 무표정이 고전적 누드의 핵심인데, 프로이트의 경우에는 살은 흔들거리는 듯하고 표정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푸르딩딩하고, 허옇고, 불그레한 물감이 얼굴 위에 올라와 있어 까닭 모를 긴장감 이 얼굴을 장악하고 있다. 이것은 프로이트 특유의 인간관, 그리고 작업 방식과 관련이 있다. 프로이트는 모델을 앞에 두고 장시간 작업하기로 유명하다. 그는 모델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표정이나 자세가 조금씩 흐트러지는 것 자체를 그대로 관찰하고 그렸다. 초상화를 그릴 때 세잔은 사과처럼 움직이지 말라고 모델에게 호통을 쳤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인간은 사과 같은 정물처럼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 부단히 변화하는 존재라고 생각했고, 그 필연적인 변화와 불안정성이 인간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필연적인 변화의 과정인 늙음과 죽음은 예외도, 예측도 허락하지 않는다. 내가 늙는 것도 서러운 일이지만, 타인의 죽음을 바라보는 것도 힘겨운 일이다. 동물들은 다른 개체의 죽음을 인지하지 못한다고 한다. 하염없이 주인을 기다리는 개는 주인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인간에게 타인의 죽음은 타인의 것이 아니다. 남은 사람들은 그 죽음을 기억하면서 살아야 하고, 타인의 죽음 속에서 자신의 죽음도 보게 된다. 프로이트는 돌아가시기 전 10여 년 동안 어머니를 지속적으로 그렸다. 그림 속 어머니는 좁은 침상에 무기력하게 누워 있다. 1970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우울증에 빠진 어머니는 자살을 시도했다. 극적으로 발견되어 목숨은 구했지만, 그 후 세상 모든 것에 대한 관심을 잃었다. 방향이 돌려진 의자는 조금 전까지 누가 앉아 있다가 일어났다는 것을 암시한다. 혼자 남은 어머니가 공허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예순이 넘은 아들 프로이트는 수의 같은 흰 옷을 입은 어머니가 죽음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은 아닐까. 소설 『몸의 일기』의 주인공도 뜻하지 않은 죽음을 보게 된다. 주인공이 79세에 26살짜리 손자가 불현듯 곁을 떠났다. 자식보다 애틋했던 손자를 앞세운 노인의 일기는 자포자기의 말로 가득하다. 주인공은 누군가가 떠난 뒤 결국 우리가 그리워하게 되는 것은 “우리 몸에서 풍겨 나오는 것들, 즉 실루엣, 걸음걸이, 목소리, 미소, 필체, 몸짓, 표정, 냄새, 촉감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는 몸에 대한 그리움이 너무도 사무친다는 말이다. 그리움은 관념이 아니라 그렇게 구체적이고 생생한 것에 대한 갈구다. 이제 나에게는 엄마의 젊고 건강하던 시절의 사진이 더 낯설다. 매일 매일 작아지는 몸을 가진 엄마. 그렇게 호리병에 들어가 요정이 될 것처럼 작아지는 몸을 가진 엄마라도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이 나는 좋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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