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올 가을은 내게 남다른 희망이 있었다. 해마다 가을이 오고 갔지만 2001년의 가을을 맞는 감회는 여느 해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이른 봄에서 여름까지한 아픔과 고독을 이겨낸 사람으로서 가질 수 있는 나름대로 현란한 꿈이었다.
유난히 눈이 많던 지난 겨울과 초봄, 무릎까지 파묻히는 눈발에도 나는 별 불편 없이 서울 특별시를 활보했다. 골목에 나가 기다란 빗자루로 쌓인 눈을 쓸어내는 특별한 즐거움도 누린 셈이었다. 대문에서 한참 떨어진 곳까지 비질을 하다 보면 괜한 신명에 온 동네의 눈을 다 쓸고 다녔다.
눈을 쓸다가 장난기가 발동하면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뭉쳐서 돌팔매 하듯 멀리 던져보곤 했다. 어릴 때 눈싸움하던 추억이 살아났고, 한두 사람 골목을 지나가는 사람들과 환한 미소로 반가운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눈의 위험, 폭설이 생활에 미치는 영향 같은 건 미처 헤아리지 못한 것일까. 나는 3년 이상 해오던 중국어 공부를 잠시 제쳐두고 태백산의 기도 여행에 동의했다. 기도하러 절로 들어오라는 스님의 권유를 달갑게 받아들인 후 함께 갈 법우들은 물색했다.
이른 봄의 산 속은 무시로 내리는 폭설로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얼음세계를 형성했다. 한낮의 햇살에 얼마간 녹아 내리던 산길은 초저녁이면 그대로 유리알 같은 빙판으로 변했다. 신도들을 저 위 보답까지 실어 나르는 봉고 차는 숙련된 운전 솜씨에도 아랑곳없이 자주 언덕을 구를 뻔하여 아찔한 순간을 여러 번 목도했다.
차라리 걷는 게 덜 위험할 것 같았고, 기실 나는 기도 와서 묵고 있는 다른 이들에 비해 젊은 축에 들었으므로 양보의 미덕도 발휘할 겸 언제나 걸어서 다녔다. 산에 와서까지 차를 탈 게 무어냐 하면서. 걷는 자체로서 나는 기도를 삼았다고 할까. 큰스님이 늘 강조하시는 난행고행의 참뜻을 몸소 실천하는 거라고 차라리 자랑스러워했다. 산 냄새를 가까이서 맡을수 있는 기회였고, 겨울 산이 주는 냉정한 매력도 빼놓을 수가 없었다.
영하 10도가 웃도는 영령보탑 앞의 엉성한 천막에서 온 밤을 선정과 독경으로 하얗게 지새우노라면 저 아래 연화봉 봉우리를 넘어오는 새벽빛의 아름다운 색깔들이 내 영혼을 포근하게 물들였다.
그러나 나는 실족하여 병원행이었고, 3개월 동안 정형외과 병동에 갇힌 바 되었다. 아파, 아파 해도 뼈아픔이라니 말과 웃음을 잃었고, 신음과 절망, 우울이 전부였다.
어려운 시간들을 용케 견뎌낸 후 서울 집으로 돌아와 여태도 병원 나들이가 이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번 가을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 가을이면 하고 싶은 일들이 이것저것 수수하게 내 마음을 설레게 했지만, 올해는 좀더 의미 있는 가을을 맞이하고 싶었다. 큰애가 있는 외국으로 숫제 떠나 볼까. 큰애도 보고 싶었다.
나는 몇 달이건 머물면서 소설 한 편 써볼까 하는 원대한 포부를 품어보았다.
그것은 무리였고, 지금의 몸 조건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비현실적인 포부였다.
차선으로 궁리한 게 섬으로의 여행이었다. 서포리의 저녁 노을과 덕적도의 작은 게를 떠올렸다. 인적 드문 섬의 호젓한 시간 속에서 장차 되어질 내 모습을 구상하고 싶었다.
섬, 섬으로 가자. 조금은 애교스럽고 산뜻한 희망 사항이었고, 마침 섬을 동경하는 문학 모임이 있어 섬으로의 여행은 순조롭기까지 하였다.
“뼈에 두 개의 하얀 점이 보이죠? 입원하셔서 정밀 검사를 받으셔야…….”
세브란스의 ○○교수는 X-ray 필름을 들여다보며 힘도 들이지 않고 말했다.
“네? 또 입원이라고요?”
무릎이 후들거린다고 했던가, 꺾인다고 했던가.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간호사가 건네준 입원 약정서를 들고 원무과로 오는데 나는 입에 침이 말랐다. 이제 가을이고, 섬이고, 내게 무슨 상관인가. 나는 파란 하늘에 풍성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구름 무더기가 갑자기 짜증스러웠다.
어디선가 매미가 울었다. 지금 울지 않으면 호기를 놓쳐 버릴 듯이 매미는 기승을 떨고 거리의 소음 속에 이내 그것은 묻혀버렸다. 가을을 겨냥한 내 꿈의 편린들이 매미 소리와 함께 먼 하늘로 정처 없이 떠가는 것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