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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돌아보면

능엄주 2014. 10. 3. 00:59

  다른 부위에 전이도 안 되고 재발도 아니다. 이제 3개월에 한 번씩 오라.’

  위암 수술 후 3년 여 동안 병원의 지시에 잘 따라주어 상태가 양호, 거의 완치에 가깝다는 ○○암센터 담당의사의 말이었다.

“어머님! 저 이제 살았어요. 이대로만 가면 학교에도 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며느리는 고양된 목소리로 소식을 전했다. 우리 집에 들르지 못하고 그냥 내려간다면서 감사합니다 라고 말했다.

 

‘감사합니다'의 대상은 병원이나 의사인지 또는 그 흉한 세월을 잘 견뎌낸 며느리 자신인지 모르지만 나 역시 기분이 좋았다.

  3개월에 한 번씩이라면 그만해도 한시름 놓인다. 아픈 몸을 끌고 매달 서너 차례 동대구역에서 KTX 를 타고 ○○암센터까지 오려면 하루해가 짧다. 올 때마다 혼자가 아니라 친정부모님과 6살, 8살 두 아들을 대동하고 와서 며칠 씩 입원해야하므로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병원에서 대구의 집으로 간 그 날 저녁부터 죽은커녕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다고 했다.

  목을 타고 식도로 주르륵 내려가야 하는 물이 목안으로 넘어가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구에서 전해지는 소식은 불길했다.

‘그렇다면 오진이었나?’

  눈 깜짝할 사이에 암의 전이가 진행되었다는 것인가.

  혹 거칠게 검사를 해서 수술 부위를 건드렸나?'

  왜냐하면 그날따라 며느리는 수면내시경 검사하는 분이 처음 보는 생소한 사람이었고, 검사 중에 몹시 아프고 힘들었다고 나에게 말했다. 그러나 며느리는 상태가 양호하다는 말에 만족해서 내시경 검사 당시 몹시 아프고 언짢은 기억을 곧 잊어버렸던가.

 

  며느리는 다시 응급실을 거쳐 ○○암센터 1인 병실에 입원했다.

  음식물을 섭취하기 위해 식도 수술, 쇠골뼈 아래에 구멍을 뚫어 스탠트 수술을 했다. 그러나 물 한 모금도 마실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집도의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항암치료를 한다는 한 마디 외에는.

 

  체력은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항암치료는 최단 시일에 며느리의 생명을 유린하는 직 코스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담당 주치의도, 집도의도 그 점에 대해 끝내 함구했다. 게다가 애송이 여의사는 불친절 동맹을 맺은 듯 환자와 환자가족에게 교만하고 불손하기가 비할 바 없었다.

 

  서른여덟 한 생명이 ○○암센터에서 수술한지 3년 차에 죽음의 골짜기를 넘어가고 있었다.

  죽음이 임박한 환자에게 무슨, 무슨 검사를 연속했고 매일 뽑아가는 피의 양도 간과할 수 없이 많았다. 속수무책이었다.

  며느리는 그렇게 ○○암센터에 그녀가 수년 동안 모아놓은 것, 아들의 집과 가족들의 자금을 몽땅 털리고  이생을 하직했다.

  남편과 6살 8살 두 아들을 두고서.

 

  너무나 허탈, 허망하여 마음 둘 곳이 없었다.

  스무 하루 기도, 백일기도, 철야정진을 했지만 그 보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조상천도재도 여러 차례 지냈다.

  인명은 재천이라 해도 수시로 분노가 치솟았다. 특정한 대상을 향해 빌거나 구한 우리가 바보였다. 현대의술과 병원을 맹신한 것도 우리의 무지 탓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서 지인의 권유로 금강경(金剛經)의 세계로 진입했다.

  우선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았다. 단지 아침저녁 금강경을 읽으면서 마음속에 일어나는 온갖 상념을 부처님께 바치는 수련을 쌓는 것이다. 바치는 데에는 부처님에 대한 공경심이 필수였다. 바치는 것은 맡긴다, 드린다, 비운다, 어떤 문제든 객관화 시켜서 나로부터 떼어 놓는다. 궁극적으로는 부처님의 밝은 지혜를 구한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자꾸 바치다 보니 모든 것이 내 마음속에서 일어난것, 내안의 업장이 재앙을 불러온 것임을 알게 되었다. 말로는 부처님 믿는다면서 부처님과 동떨어진 삶을 산 결과였다.

 

  새로 만난 금강경은 극세사 실로 정교하게 짠 마음과학, 마음철학이었다.

  복 주세요!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무작정 울며 매달리거나 비는 형태가 아니다.

  시시로 올라오는 생각들을 부처님께 바치기만 하면 부처님처럼 밝아지는 체험, 확실한 처방이었다.

  온갖 야생화가 만발한 금강경 동산에서 선지식의 희유한 법문 들으며 마침내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되었다.

 

  금강경의 진리를 체화하면서 재앙이 축복으로, 번뇌가 보리로 화하는 극적인 순간과 조우하는 것이다.

‘바친다’는 뜻은 참으로 절묘하다고 할 수 있었다. 내 문제를 바칠 데가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아! 돌아보면  지극한 슬픔 뿐, 그러나 어쩌겠나. 이렇게라도 마음을 다스리는 수밖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