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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재혼하려는 딸아, 아니다 싶으면 냉큼 돌아오너라"/조선일보

능엄주 2019. 1. 5. 22:53

조선일보


[별별다방으로 오세요!]


일러스트= 안병현
아버지의 마음을 정말로 아는 건 어머니뿐입니다. 높은 데서 뛰어내리는 아이를 두 팔 벌려 받아내던 젊은 아빠를 기억하는 한 사람이니까요. 아버지의 품은 언제나 그렇게 열려 있음을 아는 한 사람이니까요. / 홍여사

"여보, 올 한 해 착하게 살았어요?"

"나야 늘 법 지키며 양심적으로 살지."

"그럼 산타한테 선물 받을 자격 있네."

일흔 살 할배도 선물이라는 말에는 솔깃해지나 봅니다. 아닌 척하지만 제 말에 은근히 귀를 기울이네요.

"크리스마스 날, 딸내미가 집에 온대요. 신랑감 데리고…."

나이 먹는다는 것은 느려지는 겁니다. 제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남편의 귀로 들어가, 뇌에까지 도착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저는 하나, 둘, 셋 세곤 하죠. 게다가 남편의 반응이 말이 되어 나올 때까지는 차 한 잔을 마실 시간은 족히 더 필요한 줄 알기에, 저는 포트에 찻물부터 끓입니다. 제게는 선물 같은 소식인데, 남편한테는 어떨까요? 우린 일심동체니까, 결국은 같은 마음이겠죠. 하지만 고집 센 남편이 자신의 진심을 알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는 어쩌면 이런 말부터 할지 모르겠네요. "선물은 무슨. 가서 잘 살아야 선물이지!" 만약 그렇게 말한다면 저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암요. 백번 맞는 말씀! 그런데 이번엔 잘 살 거예요. 느낌이 좋아요."

남편이 법대로 사는 사람이라면, 저는 느낌대로 사는 사람이 맞을 겁니다. 십 년 전, 딸아이가 갑자기 결혼한다고 했을 때, 저는 느낌이 좋지 않아 선뜻 찬성을 못 했지요. 어째 서로가 서로를 재촉하는 것 같고, 뭔가에 홀리는 것 같은 기분을 떨쳐낼 수 없어 시간을 좀 가져보라고 했었지요. 하지만 딸은 제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그 급한 결혼이 잘못되어 3년을 못 채우고 갈라선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남편이 받아들이지 못하더군요. 노력도 안 해보고, 이혼은 안 된다는 겁니다. 노력해 보았다고 해도 그걸로는 부족하다고 했습니다. 부부간의 신뢰가 이미 깨졌다는 딸의 말에 남편은, 처음부터 끝까지 충성하는 부부 관계는 환상이라고 했습니다. 나도 네 엄마를 속인 적이 있다고, 신뢰를 제로에서부터 다시 쌓아나가라고, 뼈아프게 속고도 기회를 주는 게 부부라고 했습니다.

물론 옳고도 맞는 말입니다. 딸의 이혼을 받아들이기가 괴로운 건 저도 마찬가지였고요. 하지만 처음 부딪힌 인생의 벽 앞에서 힘들어하는 딸을 보며 무조건 남편과 한목소리를 낼 수는 없었습니다. 믿음과 애정이 아닌 노력으로 평생을 사느니 자녀가 없을 때 각자 자유로운 길을 가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현실적인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한편으로 남편에 대한 반발심도 들었습니다. 이혼을 실패라고만 생각하고 실패한 자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의 모습에서, 어쩌면 부끄러운 내 모습을 보았기에 더욱 아닌 척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남편이 반대하는 만큼 저는 보란 듯이 지지했죠. 우리 부부는 그렇게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며 자식을 더욱 혼란스럽게만 했답니다.

딸은 결국 돌아왔고 우리 곁에 잠시 머물다 곧 독립해 나갔지요. 그 뒤로 자기 일에 열중하며 마음을 추스르는 듯 보였습니다. 가끔 제가 딸에게 '기죽지 마. 무슨 잘못 했어?'라고 말하면 딸은 피식 웃으며 '잘못은 했지. 불효에, 실패에, 여러 사람 놀라게 하고…' 합니다. 듣기에 애잔했지만,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만큼은 회복이 되었다는 뜻으로 여기고, 저는 차라리 한시름 놓곤 했죠.

정작 회복이 더뎠던 것은 아버지와의 관계였습니다. '불효'라는 말로 슬쩍 피해가지만, 딸아이에게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남았을 겁니다. 가장 힘들 때 부모에게서 지지를 받지 못했으니까요. 외모부터 성질까지 빼다 박은 듯 닮았고, 그래서 말없이도 잘 통하던 부녀가 그때 이후로는 거리를 두며 속을 감추는 게 확연했습니다. 이번에 남자친구를 인사시키겠다고 말하면서도, 아버지 얘긴 아예 꺼내지 않더군요. 그 침묵 속에서 저는 느꼈습니다. 딸이 아버지에게서 다시 상처받을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요. 부녀간의 마음의 거리가 이토록 멀어져 있었음에 저는 새삼 놀라고 슬펐습니다. 누구보다 딸의 행복을 바라는 이가 아버지인데, 딸은 이제 그 마음을 모르겠나 봅니다.

찻물이 다 우러났는데, 그새 남편은 술 한 병을 돌려 땁니다. 말없이 한 잔 들이켜더니, 마침내 말문을 엽니다.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역시 같은 말을 하겠지. 무조건 더 노력해 보라고."

남편의 말에, 뭐라 답해야 할지를 몰라 술병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의 빈 잔에 술을 채워주고, 내 잔에도 따랐습니다.

"그렇지만 이번에 또 잘못된다면…."

"무슨 말이에요. 이번엔 느낌이 좋다니까. 난 벌써 사진도 봤는데 인상부터가…."

"두 번 실패는 안 되는 거라서, 억지로 참고 살지는 말라고 해. 절대 그러지 말라고 당신이 말해줘."

남편은 두 번째 잔을 고개 젖혀 털어 넣으며 눈을 감습니다. 남편에게서 흘러나온 말이 제 귀에 들어와, 뇌에까지 도달하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지만, 그 말이 마음에 확 퍼지며 눈물 한 방울을 밀어올리는 건 순간이더군요.

"여보. 당신이 직접 그렇게 말해줘요. 예전처럼 딸한테 편지라도 한 장 써서 줘 봐요."

"뭐라고 써. 살아보고 시원찮으면 돌아오라고?"

"왜 아녜요. 아니다 싶으면 냉큼 아버지 품으로 돌아오라고 써줘요. 그게 당신 진심이잖아."

남편은 빈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고개를 숙이더군요. 그렇게 고개 숙이는 모습은 저만 아는 남편의 모습입니다. 미울 때도, 갑갑할 때도 무수히 많았던 남자이지만 내 앞에서 저렇게 고개 숙이면, 더구나 자식 일로 고개 숙이면, 그 말 없는 후회와 자책이 안쓰러워 저절로 손을 잡아주게 되는…. 내 딸도 언젠가 이런 마음을 알게 될 날이 있을까요? 결국 이런 게 결혼의 의미이고 부모의 마음임을 깨닫게 될까요?

문득 남편이 고개를 듭니다. 그새 굳게 다문 아버지의 얼굴이 되어, 세 번째 잔을 채우며 제게 불쑥 묻습니다. 일부러 헛기침을 하고, 우렁우렁 큰소리를 내며, 내 귀에도 익숙한 아버지의 목소리로. 아버지한테서만 들을 수 있는 그 거칠고 굳세고 따뜻한 목소리로….

"그래, 대체 어떤 녀석이래? 당신 느낌 말고 사실대로 한번 말해봐."

※실화를 재구성한 사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