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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잡힌 영혼/박노해/『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수록 詩
능엄주
2018. 9. 4. 11:29
사로잡힌 영혼
박노해
나 어릴 적 아랫마을 용이 아제가
나뭇단 위에 꽂아온 진달래꽃을 건네주며
평아 빈산에 첫 꽃이 피었다야 참 곱지야
한 입 먹어봐라 속이 환하제
물동이를 이고 흰 서릿길을 걸어오던 점이 누나가
이마에 흐르는 물방울을 부드러운 손길로 뿌려내면서
평아 벌써 일어났냐아 샘물도 단풍이 들었다야
하도 가슴이 애려 퐁당 빠져들 뻔 했다야
아침 마당을 쓸기 싫다는 나를 마루에 앉혀두고
대빗자루 자국 선명하게 마당을 쓸고 난 어머니가
마당가 감나무 곁으로 걸어가 톡, 건드려
물든 감 잎사귀를 흙마당에 떨구고 나서 말없이
내 곁에 앉아 역광에 빛나는 붉은 잎을 바라보다가
평아 가을 아침이 참 고요하지야 미소 지을 때
바로 그때, 무언가 심오한 것이 내 마음속에서
전율하며 살아나는 경이로움에 그만 눈을 감았고
바로 그 순간, 무언가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득히
나를 데려가는 것을 떨림으로 지켜보았으니
나는 족쇄에 걸린 상상력도 미학도 인문학도 아닌
그냥 서럽고 환하고 가슴 시린 그 아름다움이란 것에
사로잡힌 영혼이 되고 말았으니
-박노해 시인의 숨고르기 '사로잡힌 영혼'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수록 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