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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의 깃발/변영희 글

능엄주 2017. 7. 1. 04:55

백중百中 기도 입재하는 날이다. 백중이란 절기는 1년 중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기운이 가장 왕성하고 사찰에서 수도하는 스님들에겐 하안거라고 하는 수행의 한 절차를 마치게 되어 중생들을 위해 기도해주기에 더없이 좋은 때라고 전해져 온다.
이른 아침부터 외출을 서둘러야 했다. 살아가면서 방치하고 소홀했거나 아쉬움을 남긴 일 있으면 기도로  마무리를 잘 해놓자는 주장이었다.  특히 부지불식간의 언행으로 타인에게 상처입히거나  억울한 죽음에 이르게 한 작은 빌미라도 제공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참회와 더불어 명복을 빌어주자는 데에 더 큰 목적을 두었다.

법당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북적대므로 나는 아예 법당 뜨락에 펴놓은 나이롱 돛자리에 자리를 정했다. 두툼한 방석을 깔고 앉아 보니 이만한 자리도 지극히 감사했다. 장마비에 물이 불어 홍제천은 콸 콸 힘찬 소리를 내며 흘러가고 인왕산을 거슬러 온 바람결도 상쾌하고 백일홍 나무 그늘은 저윽히 편안하였다.

이게 얼마만인가. 여러 해동안 공부의 나라에 잠입하여 다른 일은 엄두도 못내다가 백중 기도에 참석할 수 있음이 꿈만 같았다.  먼저 입으로 지은 업을 깨끗히 한다는 진언으로 법회는 시작되었다. 낮고 메마른 톤이지만 우렁찬 에너지가 발산되는 듯한 중생들의 독경소리가 삼각산을 울리고 홍제천 맑은 물줄기를 타고 사바세계로 흘러갔다.

이십여 년 전이었던가. 나는 천수경 千手經 의 여러 단락 중에서 '수지신시광명당 受持身是光明幢  수지심시신통장 受持心是神通藏'  에 대하여 색다른 감회를 가진 적이 있음을 상기했다.  이 몸 자체가  큰 광명의 깃발이고 기도하는 겸허한 마음이 신통한 힘의 곳간이 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 구절에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기도하는 마음은 탕자를 돌아오게 하는 마력을 지닌 것으로 풀이가 가능하게 했다.

      아늑한 산골짝 작은 집에 아련히 등잔불 비칠 때
      그리운 내 아들 돌아올 날 늙으신 어머님 기도해
      그 산골짝 황혼질 때 꿈마다 그리는 나의 집
      희미한 불빛은 정다웁게 외로운 내 발길 비추네

등잔불 심지를 돋우워 놓고서 깊은 밤 홀로 앉아 기도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문창호지에 어리는 것 같은 정경과 함께  가물가물 흔들리는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등잔불이야말로 집을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깃발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등잔불이 켜져 있는 산골짝의 작은  오두막은 어머니의 기도를 마침내 이루어지게 하는 신통력의 보고이며 곳간이 되는 이치가 아니겠는가.

무심코 따라 읽다가 아! 하고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듯이 감탄을 터뜨리는 대목은 언제나 그 구절이었다. 아! 하고 가슴이 벅차오르는 감격을 맛본 것이 그 구절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무릇 한자에는 우주 만상이 다 담겨 있다고 하지 않던가. 나는 한자 뜻을 더듬고 헤아리느라 옆 사람보다 속도가 쳐지고 더러는 어디를 읽고 있는지 숫째 페이지도 놓쳐버릴 때가 많았다.
 
내가 반한 것은 그 문장이 지닌 오묘한 뜻이었을까. 홍제천 물소리를 전면에  깔고 스님의 인도에 따라 수 십 수 백의 음색이 합쳐서 내는 신명나는 파장이었을까. 아마도 기도의 참 뜻은 그 가운데 있을 것 같았다. 사이사이 몸을 일으켜 절을 하면서 나는 이전보다 훨씬 강렬한 감동의 순간을 맞고는 했다.

"태어남은 한 조각 뜬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이란 한 조각 뜬구름이 사라짐 입니다. 떠도는 구름이 본래 실체가 없듯 생사의 오고 감 또한 그런 것입니다.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然)"

그렇다고 하면 애착을, 성냄을, 어리석음을 물리치고 물처럼 바람같이 살아가는 지혜를 어느 길목에서 터득할 것인가. 생을 떠난 이들을 위한 기도이기 이전에 현재의 나를 돌아보는 귀한 시간이었다.  계단을 내려오며 나는 옥천암玉泉庵 현판  저 아래 휘휘 늘어진 능소화꽃을 보았다. 굵은 빗방울이 활짝 핀 능소화 꽃잎을 사정없이 때리고 있었다.
 

                                

임재문  09-07-18 08:28
변영희 선생님 삶과 죽음의 의미가 요즈음 와서 더욱 더 가슴저미게 합니다. 전직 대통령의 서거로부터 또 우리 수필계의 거목이신 서정범 교수님의 작고 소식에 더욱 더 가슴저미게 합니다. 어느땐가는 훌훌 털고 떠나야 하는 우리의 인생살이가 한 없이 애처롭게 느껴옵니다.

변영희  09-07-18 10:52
올 초부터 지인, 친구, 스승님 들의 부음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서울 시내의 큰 병원 영안실을  훤히 꿰뚫을 정도로 연거푸 간 적도 있지요.
그것은 죽음이라는 큰 명제가 저와 근소거리로 가까워졌다는 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영원한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으니까요. 수시로 변화하는 것이 우주법칙인데 인간들은 그게 항구불변한 것처럼 착각 속에서 사는 게 아닐런지요.
아하 저가 무슨 말 하고 있는 것일까요? 저는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잘 죽는 훈련을 쌓아가려고 노력 중입니다. 바람처럼 흔적없이 떠나는 훈련을.
임재문 선생님 감사합니다. 우중 건강 잘 챙기시고 뵙기까지 안녕히.

박원명화  09-07-19 11:40
바쁘게 내 돌 때는 모든 걸 잊고 살다가, 불현듯 돌아가신 부모님이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오늘도 버스를 타고 가다보니 길가에 능소화 꽃이 비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아래로 몇송이의 꽃이 떨어져 있는 걸 보며, '불생불멸' 의 의미를 생각했습니다.
저 또한 어느 해인가 백중기도를 올릴 때, 못다한 효도가 서글퍼 눈물을 흘린 적이 있지요. 
변선생님 좋은 글 고맙습니다.

     
변영희  09-07-19 12:18
바삐 살다가 일년 중 우란분절 한 때라도 차분히 기도하고 자신을 돌아보자. 조상님들과 부모님의 은혜를 기리자 그런 마음 매년 칠석 백중이 되면 가져보았으나 생각뿐 그 갸륵한 뜻을 실행에 옮길 여유가 없었나 봅니다. 그런데 올해는 왜 이리 사무칠까. 형제, 자매. 혹은 친구,지인들이 하나 둘 내 곁을 떠나가고 있어서인가.< 여성문학인회>에서 년말 특집으로 유언장을 쓰라는 숙제를 받아서인가. 구구절절 심오하고 진솔한 언어들이  내 삭막한 영혼을 울려서 인가
박원명화님의 포근한 사랑 고맙습니다. '화요 강의 '모시고 갈 분이 있었는데 집안에 뭔 일이 있다고 하여서 부득이 다음 기회로 미룹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정희승  09-07-20 15:39
저는 불자가 아니어서 우란분절 기도에 한번도 참석해보지 못했습니다.  죽음을 외면하지 않고 살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현대인들은 죽음과 나이듦을 외면하는 경향이 있지요.
 '특히 부지불식간의 언행으로 타인에게 상처입히거나  억울한 죽음에 이르게 한 작은 빌미라도 제공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참회와 더불어 명복을 빌어주자는 데에 더 큰 목적을 두었다.' 다시 음미하게 되는 대목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을 모르고 지나친 것을 반성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오늘 그 의미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변영희  09-07-20 23:36
어느 날 가난한 할머니가 배고파  우는 아기를 업고 저자거리에 나갔다고 합니다. 그 때 후덕하게 생긴 다른 집 할머니가 아기를 태운 유모차를 밀고 지나가는데 보니 그 아기는 보기에도 좋은 과자를 먹고 있더랍니다. 가난한 할머니 등에 업힌 아기가 그것을 보자 더 큰 소리로 울며 보채겠지요. 그러나 가난한 할머니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절절 맸답니다. 돈이 없으니까 우는 아기에게 맛난 과자를 사줄 수는 없고 다만 그들의 시야에서 부자집 할머니가 어서 사라졌으면 하고 바랬더랍니다. 이런 경우에도 본인은 전혀 죄를 지은 일이 없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불교식으로 해석하면) 죄를, 업보를 지은 것이 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집을 짓느라고 땅을 팔 때도 인간들은 땅 속의 생물 그리고 미생물 까지 헤아리는 자비심이 요구된다고 하지요.제삼자를 배려하는 마음. 바로 그것이 참다운 인성이고 불성이고 사랑, 곧 자비심이라는 거겠지요. 바쁜 세상에 언제 그런 것 다 챙길 새가 있느냐. 하지만 한 걸음 늦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좌우 동서를 돌아볼 줄 아는 혜안이 필요한 시대 같습니다. 깊은 밤 왕송호수에서 돌아와 정희승 선생님께 답글 올립니다.행복한 오후를 보낸 데 대한 감사와 더불어.

이희순  09-07-21 11:13
매일 아침이면 거울 속의 저는 고쳐야 할 것 투성이입니다.  그러나 잠자리에 들 때마다 단 한 가지도 새로워지지 않은 제 모습을 발견하곤 말을 잊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심정과 처지를 헤아리는 마음, 타인의 생명과 존재의 의미를 상하게 하지 않는 언행이 작은 배려라면 비록 희미하나마 등불을 밝혀 타인의 어두움을 밝혀주려는 적극성은 참된 사랑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오늘도 저 자신은 단 한 가지도 고치지 못하고 새로워지지 못했지만...

     
변영희  09-07-21 12:02
이희순 선생님
우선 지면으로나마 뵙게 된 점 감사드립니다. 이름자만 보아서는 여자 이름이어서(나의 시누이 이름) 일부러 회원 명부?를 보았습니다. 그냥 여기 이 지점까지 살아오다보니 "이랬더라면 " "좀더 참았더라면" "그럴 걸......" 이와 같이 후회되는 일 많은 것 같아 쓴 글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기왕이면 사람스럽게 자연스럽게 살고자 하는 뜻으로요.선생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최복희  09-07-29 08:15
변영희 선생님 이제야 선생님 글을 읽었습니다.
이렇게 쉬지않고 좋은 글 창작을 하시는 선생님 존경합니다.
' 태어남은 한 조각 뜬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이란 한 조각 뜬구름이 사라짐 입니다. 떠도는 구름이 본래 실체가 없듯 생사의 오고 감 또한 그런 것입니다' 
이 햇살 고운 아침 이 구절을 되새겨봅니다.

     
변영희  09-07-29 20:32

마음이 쓰려서 손에 일 못 붙들고 회화나무 꽃피어 삼삼한 조계사 경내로 나들이.
어제는 중국어 동학들과  박하향 은은한 찻집에서, 오늘은  내 그림자와 둘이서 저무도록 헤매다가 글 한 편 엮게 되면 그게 차라리 은총인가.
최복희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


출처 : 한국수필작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