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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해명 선생님! - 어찌 그리 서둘러 떠나십니까 -변영희
능엄주
2016. 2. 17. 20:47
어릴 적 나의 아버지께서는 신문지상에 갓 변(邊) 자 성을 가진 사람의 기사가 나오면 그 신문을 펼쳐들고서 온 동네를 돌며 자랑을 하셨다.
변씨 성을 가진 사람이 하 드물어서 청주시의 각급 학교에서 우리 형제들이 차례로 입학, 졸업을 하고 나면 그것으로 변씨 성을 가진 사람의 입학이나 졸업은 더는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변 씨라는 성은 희성에 속했으므로 아버지가 신문을 펼쳐들고 우리 딸이 〇 대학에 합격했다며 온 골목을 돌면서 자랑을 하고 다니신 것은 전혀 잘못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원주(原州 )변씨의 시조는 고려 말 원나라 노국공주를 모시고 한국에 온 변안렬 장군이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반대하던 최영 장군이 죽임을 당하고, 변안렬 장군 역시 ‘가슴팍 구멍 뚫어 동아줄 길게 꿰어 앞뒤로 끌고 당겨 갈겨지고 쏠릴망정 임 향한 굳은 뜻을 내 뉘라고 굽히랴’ 라는 불굴가(不屈歌)를 부르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의리를 지키려다 마침내 역사의 페이지에서 사라져가야만 했다.
몇 차례나 정권과 임금이 바뀌고 나서 변안렬 장군을 복위 시키고 그들의 후손을 관직에 등용하였다는 기록은 실록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지만 역사 기록이 다 정직한 것만은 아니다.
나의 아버지는 제사 때가 되면 원주 변씨 후손임을 은근히 강조하시면서 임금의 부마공으로서의 변씨 일족에 대하여 상세한 설명을 하시곤 했다. 대청호 언덕에는 당시 임금께서 하사한 변씨네 선산이 있어 봄가을로 우리 형제들은 그곳에 가는 것을 큰 기쁨으로 알고 자랐다.
충신 혈통인 원주 변씨 한 분이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교육 일선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감성과 지성을 겸비한 수필가로서의 격조 있는 삶을 사시다가 불행히도 담낭암이란 고약한 병을 얻어 오랜 투병 끝에 이승을 떠나셨다.
2000년이던가. 척추뼈 이식수술로 거의 허리를 쓰지 못하고 엉금엉금 기어 다닐 무렵 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 문학진흥기금을 신청한 일이 있다. 나는 그것이 나에게 행운을 가져다 줄 것이란 기대는 별반 갖지 않았으며, 주위에서 신청서를 내보라 하여 그냥 한 번 내 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펜클럽 이사장 선거가 진행되고 있던 장소에서 변해명 선생님과 차를 마시게 되었다.
“세상에 그렇게 고생을 하다니, 너무 속상해서 눈물이 다 났어!‘
변해명 선생님은 그때 수필 작품 심사원원 중 한 사람이었다고 술회하셨다. 내가 제출한 대부분의 작품이 그 분을 울렸으며, 그 분은 다른 작품에 비해서 내 작품이 우수하다고 평가했다.
무관 출신 가문이어서인지 변씨들은 대부분 야인 기질이 강하다. 정의감이 남 다르고 과묵한 편이라 할까. 때문에 본이 같은 희귀한 성씨를 가졌대서 우리가 유별나게 친한 척 하거나 자주 만나 식사를 한다든지 그런 일은 별로 일어나지 않았다. 남산에 있는 문학의 집에서 금요일 저녁 ‘음악이 있는 문학마당’ 행사가 있는 날이면 남산 길을 내려와 냉면을 먹거나 칼국수를 먹는 게 고작이었다.
두 사람은 특별한 약속을 하기는 했다. 그것은 시간을 내서 시조할아버지 변안렬 묘역에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은 채 그 분은 이 세상 모든 것들과 작별을 고하신 것이다. 변해명 선생님은 교감, 교장선생님으로 학교에 출근하셨고, 나는 나대로 노상 아프면서 고단하게 살았다.
모 신문사에 계시던 소설가는 우리를 변안렬 묘역에 안내해주고 좋은 음식으로 대접하겠노라고 어서 오라고 채근했다.
그러나 우리는 피차 그럴 만한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내 생각에는 국사 교과서에 단 두세 줄에 불과한 변안렬 장군에 관한 역사소설을 반드시 써야겠다는 의욕과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좋은 안내자가 초청하는 데도 그것을 실천에 옮기지 못한 채 선생님은 끝내 나의 곁에서 영영 떠나가신 것이다.
침착하고 점잖은 분, 나이에 비해 노숙한 분, 위엄이 있고 그러면서도 따스한 인품이 느껴지는 분, 소설 못지않게 깊이 있고 학술적이기까지 한 그 분의 수필세계는 김열규의 ‘올이 극히 가느다란 색실들로 수놓아진 가리게 병풍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 언어의 극세공품' 이라는 평설에 전적으로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시골에서 할머니와 살았던 이야기도 수필에 비친다. 시골 생활에서 빚어지는 진솔하고 순후한 이야기는 학생을 훈육하는 자애로운 스승의 면모가 엿보이며,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침 없이 평형감각을 잘 견지하고 진정한 교육자의 길, 수필가로서의 길을 올곧게 걸어가신 분으로 추앙받을 만 하다.
혹 더 큰 상을 타신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을까. 나는 그 분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랬더니 아, 어쩜 그리 서둘러 한 점 바람인 듯 표표히 떠나가신 것일까. 세상 인연을 다 끊으시고, 아끼고 사랑하던 문하생들과 동료 작가들, 그리고 그 분 인생의 가장 보배로운 자산이었던 수필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먼 곳으로 떠나시다니 기가 꽉! 막혀 무슨 말을 더 할 수가 없다.
그분의 영전에 바치는 나의 기도는 시방법계 (十方法界 )어디에도 두루 통하는 ‘사랑합니다. 미안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의 네 가지에 응축되어 있다. 많은 시간을 함께 나누면서 좀더 살갑게 자주 만나지 못한 점, 시조 할아버지 묘역에 가지 못한 것 등 모두가 아쉬움이고 미련이 아닐 수 없다.
선생님. 참을 수 없는 암의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의 세계로 훨훨 날아오르소서. 다시는 질병과 어둠의 세력에 점령당하지 마시고 평화의 동산에서 복락을 누리소서. 아프고 괴로웠던 이승에서의 기억 다 떨치시고 하늘나라에 도착하시면 조경희 선생님께, 그리고 허세욱 선생님과 김태길 선생님께도 안부 전해 주십시오. 하늘나라의 저의 아버지께서도 원주 변씨가 오셨다고 한달음에 달려 나오실 게 틀림없어 보입니다. 그리운 선생님, 저의 아버지께도 안부 부탁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선생님께 긴히 약속드릴 게 있습니다. 변안렬 시조 할아버지를 소재로 큰 소설 써서 선생님이 계신 하늘나라로 우송하겠으니 선생님은 오직 그날을 기다려 주시기를 간절히 비옵니다.
변영희 드림
| 임재문 | 12-05-11 00:42 |  | 한밤에 눈시울 적십니다. 변해명 선생님 !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세요. 변영희 선생님의 슬픔은 우리 모두의 슬픔입니다. 한치 앞을 모르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너무나 갑자기 가셔서 더욱더 허무함을 느끼게 됩니다. 변영희 선생님의 대작소설을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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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영희 | 12-05-13 07:45 |  | 발돋음하며 기다리나요? 눈부신 그리움 자꾸 깊어만 가고
두근거리는 가슴 띄우지 못한 편지처럼 사연을 가득 담은 하얀 손수건
변해명 선생님의 수필집 <우주목과 물푸레나무> 중 '은사시나무' 에서
임재문 선생님 오래 못뵈었습니다. 제일 먼저 달려와 댓글 주심에 더없는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띄우지 못한 편지'처럼 아쉽고 그리운 마음만 가득합니다. 선생님 늘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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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화 | 12-05-11 01:48 |  | 변영희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변해명 선생님에 대해 보다 깊이있게 알게 되었습니다. 변해명 선생님 영전에 드리는 약속과 추모의 글을 변해명 선생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줄 믿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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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영희 | 12-05-13 07:57 |  | "많은 묘지를 내려다 봅니다. 넓은 산등성이며 골짜기를 모두 메운 그 많은 쉼터는 군인들 열병식하듯 질서정연하게 층계를 타고 늘어서 있는데....저도 언젠가는 이 자리에 누워 세상을 보겠지요." 변해명 선생님의 수필집 <우주목과 물푸레나무> 는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견 한 듯, 전의 수필집들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 모두 그게 언제인지 모른다뿐. 삶과 죽음에 대해 성찰해 봅니다. 이진화 선생님 고맙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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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행원 | 12-05-12 22:52 |  | 변영희 선생님의 글,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변안렬 시조 할아버지의 소설 기대됩니다. 변해명 선생님의 과묵하지만 결단력이 좋고 그리고 문학에 대한 깊은 조예를 우러러 보면서 존경했습니다. 허전한 마음을 달래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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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영희 | 12-05-13 08:05 |  | 올 봄 저는 혼자서 눈물을 지금지금 흘리며 지냈습니다. 저는 울고 있는데 사람들은 웃는다 하고, 저는 아픈데 좋아보인다고 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소리 없는 눈물이 저도 모르게 쉬임 없이 흘러넘쳤습니다. 술 마시고 흠뻑 취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 할듯 싶고, 아주 먼 타국으로 훌쩍 떠나버릴까 궁리도 했습니다. 이럴 때 좋은 작품이 나온다면서요? 기가 딱 차서 슬프고 방황할 때...ㅎㅎㅎ 선생님의 따스한 말씀 가슴에 깊이 간직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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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문 | 12-05-13 14:40 |  | 선생님, 비감함을 다시 느끼게됩니다. 밀알의 씨앗이되어 세상떠나신 고인, 웃고 있어도 눈물이나고, 가만 있어도 가슴 아픈 선생님의 심사, 한 줌 고귀한 토양이 되어 아름다운 씨앗을 싹틔울 것입니다. 내내 건강하옵소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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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영희 | 12-05-14 19:30 |  | 종일 비가 내립니다. 근래에는 드문, 아주 운치있게 봄비답게 내립니다. 창 밖 단풍나무 잎새에 맺힌 빗방울이 어찌나 예쁜지요. 비 오는 날 모처럼 책을 들었습니다. 책 속에 길이 있다지요?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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