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스님
큰 스님
염불보다 큰 스님이었다. 나 뿐 아니었다. 오로지 큰 스님 손 한 번 잡아보거나, 자비로운 눈길을 갈망하고 잠시잠깐이라도 큰 스님에게서 무슨 말씀 한 마디라도 들으려고, 전국 각처에서 수천을 헤아리는 중생들이 오지인 태백산 자락의 사찰에 모여들었다.
일반 평범한 신도들은 큰 스님 곁에 도저히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당시 정권 실세들이 대거 무리져서 그 사찰을 찾아왔기 때문이다. 초파일에는 그들의 명의로 대형 연등이 지금 그 자리의 명칭이 떠오르지 않지만, 가장 눈에 잘 보이는 좋은 위치에서 태백산의 밤을 밝히던 것은 기억난다.
무슨 연유인지 모르지만 큰 스님은 초면인데도 반갑게 먼저 악수를 청하시고, 나를 큰 스님 방으로 데리고 가셨다. 그리고는 사찰 권속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나를 소개하셨다.
"장차 우리도량을 위해 큰 일을 할 보살" 이라고.
나는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몰랐고, 지금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이다. 나는 그저 내 번뇌망상에 겨워서 자주 그 멀고 먼 태백산을 무궁화호 기차를 타고 왕래했다. 무궁화 호 기차를 타고 오가며 창밖으로 산과 내, 들꽃 어우러진 풍경을 여럿이 혹은 혼자서, 서너시간 동안 풍성히 즐길 수가 있었다.
해인사에서 이적해 오신 S 대학 출신 비구니 스님 한 분은 유독 나에게 각별하셨다. 도량에서 가장 높은 산, 임시 천막안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스무하루 철야기도할 때 사용하라고 핫팩을 챙겨주시고, 기도하다 지치면 스님 방에 와서 잠을 자라고 온정을 베푸셨다. 공양간 보살님들은 밤중에 기도하다 허기지면 먹으라고 구수한 누룽지도 한 봉지 내 손에 쥐어주곤 했다.
내가 세속 일로 사찰의 중요행사에 참석하지 못하면 비구니 스님께서는 큰스님 법문이 담긴 테잎과 그 사찰의 약수, 감로수를 병에 담아 단오 절기에 맞춰 인편에 보내주셨다. 큰 스님의 말씀이 유효했던지 나는 그 절에 가면 대접받는 기분이 들었고, 내가 반드시 그 절에 가야하는 것으로 알고 거의 모든 사찰 행사와, 큰 스님의 묘법연화경 특강에 참석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대수술 후 몸이 불편했으므로 근 삼년 동안 법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럴 때는 비구니 스님이 큰 스님 법문 테잎을 몇 상자나 되는 분량을 인편에 보내주시면서 부지런히 공부하라고 격려해 주셨다. 법문을 녹음한 테잎 그 중에는 공교롭게도 하필 내가 불참했을 때, 내 전생을 주제로 한 큰 스님의 법문 내용이 들어 있었다. 전생에 법사공덕을 받고 중생을 가르쳤다는, 천생 부처님 책을 써야하는 사람이라고, 처음 접하는 내 전생이야기가 신기했다. 나는 누운채로 열심히, 비구니 스님의 정성을 헤아리면서 법문 테잎을 듣고 또 들었다. 그때 나는 내가 살길은 오직 법화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 앉지도 눕지도 못하고 선 채로, 妙法蓮華經을 독송하고 사경하면서 내안의 깊은 우환憂患을 달랬다.
이 새벽 왜 큰 스님 생각이 났을까. 내 생명의 연한年限이 다가오는 것은 아닐까. 내 친구들 특히 초등 남자 동창들 몇 명은 일찍이 저 세상으로 가버렸고, 여자 친구들도 병으로 하나 둘 내 곁을 떠나가고 있다. '고생고생하면서 책을 두어 권 쓰면 옷벗고 간다'는 큰 스님 말씀이 내 영혼에 각인돼 있다. 그 때가 바로 지금인 것인가.
큰 스님의 그 말씀, 전생에 법사공덕을 쌓은 나, 사람을 가르친 그 업을 이생에 와서 상정진常精進하지 않은 죄값을 하느라고 이 고생인가, 이렇듯 살은 살대로, 뼈는 뼈대로 몽땅 해체되는 것처럼 모질게 아픔을 겪는 것인가. 정신을 차릴 수 없도록 극심한 통증을 겪을 때, 그 통증을 잊기 위해서라도 나는 역설적으로 글을 읽고 글을 쓰게 되었다. 그 이치가 가상하다할지, 처참하다할지 하루하루가 형자刑刺의 길, 가시밭길 아닌 게 없다.
전에 문학상을 탈 때였다. 여러 사유로 해서 나는 그 상을 받고 싶지 않았다. 상에 연연하지 않았고, 나는 그 수상이 무엇을 의도하는지 이해가 부족했다. 상을 주관하고 베푸는 사람들의 인품이랄까 관행이랄까 나는 상세히 알지 못해도 내가 그 상을 받는게 부적절해 보였다. 그밤 고민끝에 겨우 잠들었는데 꿈속에 큰 스님이 나타나셔서 말없이 내 손을 이끌었다. 나는 곧 알아차렸다. 현실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내키지 않았지만 찜찜한 마음을 누르고 그 상을 타기로 했다.
내가 책을 출간해서 가지고 가면 큰 스님은 책 내느라고 고생했다면서 여러 사람앞에서 나를 칭찬해주시고 용돈을 후하게 내리기도 했다.
이런저런 일들이 이 새벽에 왜 떠오른 것일까. 섬에서 귀가하고 나서 내가 너무 아프다. 아무래도 바닷가 절벽을 기어오르다 요상한 포즈로 넘어진 게 뼈에 금이 간듯, 인대가 늘어난 듯, 유난히위에 올라간 남자가 붙들었다 금방 놓아버린 내 왼손으로부터 시작해서 왼쪽 몸이 몹시 아프게 된 이유 같다. 오른쪽 무릎이 요상하게 뒤틀렸다나 오른쪽 무릎과 발목도 시큰거렸다. 그런 자세로 넘어지면 십중팔구 골절상을 입는다고 옆방 작가가 알려주었다. 골절은 면했으나 두고두고 아파서 넘어진 후 내 체력이 급속도로 하강한 것을 체감한다. 정형외과 물리치료도, 한의원의 침 치료도 시간과 돈 낭비뿐, 아직은 진통제 없이는 잠을 못 잘 정도로 별무효과다.
하도 아프니까 그 아픔을 희석시켜보려고 노트 북 앞에 앉은 것이 아니냐. 나는 이처럼 푸념이 길다.
억수로 추운 날 새벽, 오래 전 열반하신 큰스님을 그리며 시름을 달래보려 했던가. 내게 글쓰기의 고통 또한 만만하거나 가벼운 것이 아니거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