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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나들이

능엄주 2022. 2. 10. 12:08

서울 나들이

 

이른 아침 전화가 왔다. 나에게 딱 어울릴 만한 품격있고 어디에 입고 나가도 돋보이는 옷이 들어왔다고. 다른 사람들이 탐을 내어 가져가기 전에 일찍 나오라는 내용이었다. 이미 그 옷을 본 사람들이 몇 명 있고 내가 늦게 나오면 누군가가 선점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주를 달았다. 

 

옷 떨쳐 입고 나갈 데가 없어진 게 언제적 이야기인데 지금 옷을 운운하는가. 평소에 내 복장이 허술하거나 초라해 보였던가. 아니라면 글 쓴다고 들앉아만 있지 말고 예쁜 옷 입고 사람들과 만나 좋은 장소에 가라는 의미인가. 글쎄다. 코로나19에 좋은 장소가 있기는 한가. 나에게 옷이 지금 왜 필요하고 왜 아침부터 거론하는가. 나는 그 이유를 모르겠다.

 

"기왕 옷을 입을 거면 10년, 20년이 가도 실증 안 나고 고급한, 고가의 외제를 사 입으라는 충고를 들은 적이 있지만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를 호출하는 것은 평소에 내 성품을 잘 모르는 소치일 것이다. 어릴 때도 나는 언니와 어머니로부터 늘 그와 비슷한 질책을 받아왔다. '거지도 손 볼 날이 있다'면서 반 강제로 백화점으로 남대문시장으로 나를 끌고 다니며 언니는 어머니의 '거지도 손 볼 날'을 거의 주문처럼 내 앞에서 반복했다.

 

어머니와 언니의 옷에 대한 강력한 견해 피력은 나에게 스트레스 그 이상의 심리적 장애를 가져오기에 이르렀다. 옷뿐이랴. 붙들어 앉히고 내 얼굴에 분칠을 감행했다. 원하지도 않는데다가 지극히 혐오하는 편인데 막무가내로 내 하나뿐인 언니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화장품을 다 동원하여 얼굴에 요괴妖怪 같은 그림을 그려놓아 마침내는 귀찮게 구는 집을 떠나자는 결심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지 않았던가.

 

오늘은 의도적인 요괴 같은 분장이나 분칠하고는 거리가 먼, 실제로 내 얼굴에 이상?이 발생하여 약을 사러 나가려는 뜻이 있었다. 먼저 나의 균형있고 질 높은 복색服色을 위해 전화를 걸어준 분의 성의를 무시하기보다는 직접 가서 나에게 고가의 우아한 옷이 불필요하다는 이유를 잘 이해하도록 말씀드리고 난 후에, 내 볼 일을 보는 것을 순서로 잡고 집을 나섰다.

 

어제 내가 주인공?인 긴요한 만남도 묵살했으면서 나는 섬에 머물 때 머리카락만 뭉턱 뭉턱 빠지는 것 뿐 아니라, 얼굴에 마구 돋은 근지럽고 따거운 뽀루지를 치유하기 위해, 인터넷 검색으로 채집한 정보를 들고 약국이 대거 몰려있는 종로 5가로 갔다. 피부과나 내과를 가면 요즘 동네병원조차 코로나19로 복잡하고 소요스러울 것 같아서 병원에 갈 생각은 아예 접었다.

 

3가에서 내려 5가까지  꽤 많이 걸어내려갔다. 날씨가 풀리기도 했지만 서울은 내가 살고 있는 경기도 서북지역에 비해 전혀 춥지 않았다. 걷다 보니 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종로거리는 전날에 비해 사람들의 왕래가 적었다. 쓸쓸하다. 텅 빈 거리에 봄 햇살은 밝고 포근했다.

 

약국마다 내가 적어 가지고 온 품목에 대해 거의 없다고 한다. 또 어떤 약국에서는 처방전이 있어야 살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내 볼일을 이렇게 포기하는 것이 괴로웠다. 얼굴이 가렵고 따거워 노상 잠을 설친다. 요즘 새로 집을 사 이사한 후배에게 전화했다. 기왕 서울특별시에 나왔으니 얼굴 한 번 보고가자는 의도였다.

"언니 어서와요! 기다릴 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한 마디로 대 환영이었다.

 

다시 지하철을 타러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철은 한산했다. 버스로 환숭하여 신촌에 갔다.

"아침 밥은 드시고 나오셨어?"

후배네 집에 들어서자 후배는 바로 점심 상을 차렸다. 후배가 직접 담근 깻잎장아찌와 고들빼기 김치가 입맛에 맞았다.

후배와 앉으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 무슨 이야기든 박자가 잘 맞아 친형제보다도 더 척척 이다. 후배의 언니와 한 반인 나는 중3, 후배는 중1 일 때 우리는 만났다. 그 만남이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우리는 가정 안에서 소통이 전혀 안 되는 경상도 출신 남편을 만난 공통점이 있고, 아이들이 어릴때 같은 학교를 다녀 인연이 깊다.

 

갑자기 N군에서 전화가 오므로 우리의 수다는 중단되고 나는 귀가를 서둘러야했다. 느슨하게 놀 때가 아니었다. 한달 동안 내가 독파한 6권의 책에서 가려뽑은 중요 사항을 재검토하고 일을 마무리지어야 하는 과제가 떠올랐다. 

"아이구 언니! 모처럼 나오셨는데 저녁까지 드시고 더 놀다가시지~"

후배는 버스정류장까지 나를 배웅해 주었다. 대체 어느 전생에 우리는 만났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