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도 섬을 떠나며
노도 섬을 떠나며
집에 갈 날이 하루하루 다가오자 조금씩 마음이 들떠 있다고 할까. 비가 오거나, 바람이 좀 심하게 불면 배가 뜨지 않는다. 배타고 갈 곳이 없는데도 갑갑하고 아득해지던 외딴 섬을 떠나는 마음은 가볍고 기뻤다. 작별을 위하여 나는 서포 문학관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면서 보니 겨울바람이 거센 데도 불구하고 산 바위 아래 풀들이 파랗게 제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바위를 융단처럼 감싼 풀이끼도 윤기가 자르르 흘러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준비를 하는 듯 보였다.
바닷바람을 많이 타는 것은 잘 자란 큰 나무들이 대부분이었다. 동백나무보다도 더 많이, 한아름이 더 돼 보이는 소나무를 밑동에서부터 위까지 칭칭 감고 올라간 을목들, 칡 같은 질긴 넝쿨이 누렇게 퇴색한 채 소나무 둥치를 휘감고 놓아주지 않는 형태였다. 보기에 아주 흉물스러웠다. 거친 바람에도 넝쿨 종류들은 저 죽기를 각오하고 소나무를 비끄러매는 것 같았다. 그것은 충신을 죽이면 간신도 마침내 죽고야 마는 이치를 망각한, 간신들의 집요한 상소가 올라오는 듯한 모양새였다.
"전하! 통촉하시옵소서! 김아무개는 멀고 먼 섬으로 원찬해야 마땅한 줄 아옵니다."
서포 선생이 선천 유배지에서 귀가한지 불과 얼마 안되었다. 임금에게 김만중을 위리안치하라고 재촉하는 간신들은 뒤로 물러설 틈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서포 선생을 큰 죄인으로 옭아매 사지로 내몰지 않았던가. 그 사지가 한양의 최극단 남해였고 서포 선생이 마지막 운명한 곳은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노도 섬이었다.
그동안 소설 쓰는 틈틈이 노도 섬에 대한 간단한 소회素懷를 써놓은 것이 있어 서포문학관에 온 김에 출력하려고 했다. 서포 문학관에 들어서면 나는 마음으로 영혼으로 서포 선생의 초상화에 예를 표해왔다. 전에는 출입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벽면에 모셔져 있던 것을, 지금은 서가의 맞은 편으로 옮겨 모셨다.
나는 초상화 앞에 걸음을 멈추고 서서 눈을 감는다. 똑바로 마주보기가 송구스러웠다. 초상화로나마 서포 선생의 모습을 바라불 수 있다는 게 영광스럽다고 할까. 바라만 보아도 슬픔이 치솟았다. 300여 년이 흘렀으나 이처럼 척박한 곳, 산과 바다로 둘러싸인 이곳에서 3년 2개월을 보낸 [남해의 고독한 성자(聖者)] 서포 선생을 떠올리면 무시로 눈물이 난다. 나는 고작 3개월여를 지내면서도 지글지글 몸살을 앓고 있다.
그런데 이 날, 나는 서포 선생의 유난스레 반짝이는 눈동자와 마주쳤다. 벽면에서 약간 튕겨져 나온 듯한 초상화, 그 순간 그 눈은 살아 있었고 뚫어질 듯 나를 바라보았다. 얼굴 전체에서 오직 두 눈이 두드러져 보였다. 그 눈은 뚜렷한 광채가 있었다. 나는 노도 섬을 떠나며 서포 선생에게 마지막 기도를 바치고 조용히 뒷걸음질 쳐서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 후 서포 선생의 형형한 그 눈빛은 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출력한 [노도 일기]를 가슴에 안고 비탈길을 내려오며 나는 생각했다. 그 눈빛에 간절함이 깃들어 있음을, 수백 수천의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음을, 생기와 총명함이 동서사방에 금가루처럼 흩날리는 것을, 희망과 결의였을까. 결코 절망스럽거나 슬픈 눈빛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지상에서의 나에게 할당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명심하라. 서포 선생의 눈빛에는 그런 뜻도 함의 돼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집에 돌아와 아프다, 괴롭다 하고 느슨할 수가 없다. 딸이 주문해놓은, 장장 한 책이 10포인트 작은 글씨로 700 페이지에 달하는 두 책을 받았다. 부지런히 읽어야 한다. 심경호 교수님의 역서譯書, 1,000 페이지 가까운 주역철학사도 전체를 읽고나서 내 나름으로 요약본을 작성해 놓았다.
나는 지금 일을 시작할 수 없을 만큼 넘어져 다친 부위가 많이 아프다. 폰을 들고 통화하기도, 허리와 다리가 켱기고 아픈 걸 어찌하겠나. 내일은 동학을 따라 침을 맞으러 갈까. 왜 이렇게 점점 더 아파지는가. 긴장이 풀어져서일까. 걸음도 걸을 수가 없다니, 가부좌를 할 수 없도록 무릎이 접혀지지 않다니.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나는 노도 섬을 떠나며 본 서포 선생의 그 형형한 눈빛을 기억해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