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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일 기도

능엄주 2022. 1. 4. 20:42

100일 기도

 

딸은 나의 노도 섬살이를 백일기도라고 이름을 달았다. 내일이면  노도 섬 작가창작실에 입주한지 꼭 백일이다. 딸이 벡일기도라고 이름 달지 않았어도 나 역시 기도하는 심정이었다. 기도 없이 어찌 큰일을 진행할 수가 있단 말인가. 내가 좋아해서, 글을 쓴다고 하지만  글을 내가 쓰고 있다기 보다 나는 글이 쓰여지고 있다라고 말하고 싶다.  어떤 나 이외의 다른 강력한 에너지가 있어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하고 있는 것이라고 느낀다.

글을 쓰는 것, 그 노동의 강도는 엄청나다. 겉 보기에는 조용히 책상에 앉아 있어 한유해 보이고 어쩌면 신선놀음처럼 보일지 모르나 날이 갈수록 대체 내가 왜 이렇게 고달픈 인생을 살고 있나 회의할 때도 있다.

토니어 크래거가 말한 것처럼 '문학은 때로 저주'일 수도 있다고 수긍한다.  현실을 도외시하고, 인생의 평범한 묘미를 상실한,  똑똑한 바보로 전환된다. 소설은 양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상당한 중노동이므로. 

 

지난 12월 27일 관음포 문학기행 다녀오던 날 다치지만 않았어도, 병원에 다니지 않았더라면 나는 적어도 임인년이 시작되기 전에 일을 마쳤을 터이다. 1월 3일 밤샘까지 하면서 간신이 일단락을 지은 것, 나로서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몰두해서 쓸때는 몰랐다.  3일 밤을 거의 새우다시피 책상에 있다보니 어지럽기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발등, 종아리부터 머리꼭지까지 몸전체가 경련이 났다. 넘어지고 나서 병원을 몇 번 다녔지만 나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처방해준 악이 하도 독해서 몸이 통으로 꼬이고 쥐가났던 것이다. 눈을 붙여보려해도 뇌의 긴장이 풀리지 않아 좀체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잠도 설친 채 일찍이 서포 문학관에 전화했다. 내가 갈 수 있는 시간을 문의했다. 이왕이면 내친 김에 출력을 해서 원고를 다시 보고자 함이었다. 천천히 산길을 올라갔다. 왼쪽 옆으로는 아름다운 푸른 바다가 굽이굽이 펼쳐지고 오른 쪽은 잎 다 떨군 나무 숲이 빽빽하다. 나는 고라니와 노루가 자주 나온다는 산길이 무섭기도 하고 멀고 가팔라서 숨이 찼다.

 

그동안 시간이 아까워 바야흐로 동백꽃이 피어나는 구운몽원, 사씨남정기원, 그리움의 언덕이라고 근사한 팻말이 붙어 있는 정상에도 올라가지 못했다. 종아리가 퉁퉁 부으면 최근 바닷가 쪽에 이곳 관리소장님이 새로 닦아놓은 길을 햇볕도 쪼일겸  2,30분 걷는 게 고작이었다. 처음 올 때부터 줄기차게 책상만 지켰다. 이번 작업이 워낙 어려운 과제였기 때문이다. 어디 이번 뿐이랴. 책 한 권씩 출간할 때마다 나는 10년 세월을 일시에 늙어간다. 

 

예의 바르고 겸손한 문학관 젊은 직원이 반갑게 맞아준다. 따끈한 차도 내왔다.  이곳에 와서 모처럼 향기나는 사람을 만난 기분이 들 정도였다. 부지런히 자기 발전을 꾀하는 열공하는 우수직원이었다. 직원의 도움으로 내 원고는 바로 인쇄돼 나왔다.  100일만의 실적이었다. 고맙고 대견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 생각에 앞서 내가 참 아둔하다고 자책을 한다.  나는 벌써부터 지치고 아파 있었다. 주변 환경이 지극히 척박하고 불편한데다 먹이가 노상 부실했다. 노도 섬에서 생산되는 호박 한 덩이, 시금치 한 소쿠리에 내 건강을 매달고 하루하루 지나온 게 기적이었다.

 

딸이 수차례 택배 보낸  무슨 재료가 두루 냉장고를 차지하고 있어도 만들어 먹지 않았다. 여기까지 와서 언제 그 북새를 떨고 있겠느냔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바로 자리에 눕게 되지 않을까, 집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는 있을지 걱정하며 산길을 내려왔다. 생경한 곳에서 오로지 서포 선생을 떠올리며 정신력 하나로 버텨온 100일이었다.

 

대전 친구가 말했다. "너 집에 가면 앓아 누울 거다!"  또 한 친구가 연달아 카톡을 보내왔다.  "참 대단하다. 외딴 섬에서 100일씩이나 어떻게 살았니? " 서울의 보살 친구는  "당장 올라와요. 왜 생고생을 자청해요. 제발 좀 즐겁게 살아요." 했다.

 

실제로 이곳에서의 생활이 나에게 무척 버거웠다. 다른 창작실에서는 시간맞춰 구내식당에 밥 먹으러 잠시 나갔다 오면 되었다. 여기서는 쌀부터 모든 식재료 등을 배를 타고 읍내로 나가서 조달해야 하고 세끼니를 각자 해결해야했다. 배편이고 버스편이 금방 연결되는 것도 아니므로 시간도 돈도 들었다. 우선 번거로웠다.  작업에 방해가 되었다. 열가지 백가지가 다 불편한 실정을 사전에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이제 후련하기도하다. 첫 단계 마침표를 찍었으니 하루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이곳을 더 견뎌낼 자신이 안 선다.  짐을 싸려고 둘러본다. 여기 현지에서  수소문하여 구한 자료와 책이 대폭 늘어났고, 100일동안 끼니를 마련하느라 소소한 물건도 많이 불어났다.  100일 간 벌여놓은 좌판 거둘 일이 대두된다. 이게 예삿일인가.

 

온 몸의 기관 부위가 괴롭다고, 더는  문원文苑 너하고 못살겠다고 아우성친다.  마침내 내 안의 또 다른 문원 선생이 명령한다. 밤이 깊었으니  그만  잡다한 사념 거두고 방으로 들어가 쉬라고.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라고. ....

 

"...나의 인생과  나의 문학은 온전하고 완벽하며, 강하고 튼튼하거니와, 정답고 조화로우며 행복하다."

나는 성공의 문을 여는 기도문을 외우며 방으로 퇴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