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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강만의 노을

능엄주 2021. 11. 27. 01:23

앵강만의 노을

 

낮에 저 아래 '서포의 책' 으로 걷기를 나가지 못하고 해가 저물었다. 몰두하다보면 종종 이런 일이 발생한다. 나에게 몰두는 축복이었다.  몰두하지 못하고 심신이 어지러운 날은 하루해가 여삼추였다. 더구나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먼 타지에 와서 본래 하던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것은  내가 견뎌내기 힘들어한다. 

 

글을 쓰다보면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참신한 아이디어가 떠오른다거나 별로 고민하지 않고서도 유난히 글줄이 잘 풀리는 날이 있다.  어제가 그런 날이었던가. 나는 해질녘까지 책상을 지켰다. 대체로 하루 일과를 제대로 진행한 날이었다고 흡족히 여겼다.  갑자기 밖으로 나가 상쾌한 바닷바람을 쏘이고 싶었다. 누가 부르기라도 한 것처럼 급히 옷을 더 입고 머플러를 둘렀다. 집밖으로 나갔다.

 

아! 나는 찬탄해 마지 않았다. 앵강만 노을이 하늘 가득 불타고 있었다. 어떤 날은 화려하고 따스한 주홍빛으로, 어떤 날은 보라와 남청색도 보이는 다소  애조띤 색채로, 오늘은 여수항 저멀리서부터 앵강만 일대가 온통  꽃자주빛 진빨강으로 보였다. 나는 해저물어 쓸쓸한 시간에 밖에 나오길 백번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프도록 장엄했다. 상서로웠다. 꾸밈없는 자연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글로도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었다. 망연히 그저 서 있었다.

 

그랬다. 앵강만의 노을을 보는 것 만으로도 나는 이곳에 온 보람을 영혼으로 느꼈다. 300여 년 전 서포 선생도 눈 시리게 보았을 저 진경! 저 감동! 저 경이!  그 때는 멀리 어둠속에 보이는 미국마을의 불빛도, 다랭이 마을의 정다움도,  게다가 산 허리를 뚫어 길을 만들지도 않았을테니 사방이 바다고 산이고 구름 뿐이었을 것 같았다. 소리도 빛도 인적도 없는 오직 앵강만의 노을만이 적요한 무덤같은 노도 섬을 빛내고 있었으리라. 나는 아! 하고 입소리를 한 번 내고는 그 옛날 서포 선생의 뼛속을 후비는 지독한 고독을 헤아리며  하염없이 서 있었다.

 

점차 어둠이 주변을 에워쌌다. 바람이 강하게 불어왔다. 기꺼움 가운데 근원을 알 수 없는 서러움이 울컥 솟았다. 나는 맨손체조로 몸을 푼다음 집으로 들어왔다.  L 선생님이 보내준 '세계의 불가사의 7가지' 동영상을 보면서 심신을 편안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내일부터는 앵강만의 노을을 놓치지 말자고 다짐했다. 좋은 경치를 보려고 다른 데 찾아갈 것도 없다. 오늘 본 앵강만의 노을은 어떤 경치보다 수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