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파
한 파
기상청의 오늘의 일기 예보는 한파였다. 올 가을 들어 가장 추운 날이라고 했다. 서울과 수도권에, 아니 다른 지역에도 눈발 휘날리고 길이 미끄러워 출근길 조심하라고 한다. 하긴 시기적으로 추울 때도 되었다. 전에 고3 생들 수능보는 날은 대개 영하권으로 떨어져 학부모들이 걱정했다. 올 수능 때는 날씨가 포근하더니 오늘에 이르러 한파 예보를 듣게 되었다.
새벽에 책상으로 나왔다. 앉자마자 한기가 몰려왔다. 노도에 와서 두 번 째 느껴보는 한기였다. 오늘의 한기는 지난 번보다 좀더 심했다. 창문을 열지 않았는데도 당장 온 몸으로 냉한 공기가 둘러쌌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나는 추위가 제일 무서웠다. 어려서 집에서 가까운 학교를 두고, 교육열이 남다른 부모님 덕분에 멀고 먼 시내 밖에 있는 국립 초등학교에 다닐 때 이미 얼어버린 것 같았다.
시내 중심을 빠져 나와 무심천 둑방을 걸어 남다리를 건널 때는, 지옥문으로 들어가듯 몸서리가 쳐졌다. 전봇대에서 윙윙~귀신 우는 소리 같은 것도 들려오고, 책보를 든 손은 쩍쩍 갈라져 피가 났다. 솜씨 좋은 나의 어머니가 밤낮을 쉬지않고 털실로 장갑을 짜고 양발을 짰지만 내 순서가 되려면 멀었다. 어머니는 위에서 부터 짜는 거라고 했지만 알고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았다. 우는 아기 젖준다고 수시로 보채고 까탈 부리는 동생들이 나보다 먼저였다.
남다리를 건너기 전 작은 구멍가게가 하나 있었다. 겨울철의 심한 바람을 막을 나무 기둥 몇 개에 이불 호청 같은 것으로 들씌워 놓았다. 좌판 두어 개에 눈깔사탕을 비롯, 셈빼이, 밥풀 과자, 비과, 찌들어빠진 오징어와 손으로 빚은 콩엿 같은 것을 벌려놓고 초등생들의 코묻은 돈을 목표로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 가게는 참으로 고맙고 요긴했다. 우선 조금이나마, 잠시라도, 그 가게 천막 뒤에 붙어서면 무심천에서 불어오는 강풍을 피할 수가 있었다. 가며오며 그곳은 추위를 피하는 곳, 시린 손을 주물러주는 곳이었다. 어쩌다 용돈을 탄 날이면 쇠파리가 들러붙어 단물을 다 빨아 먹었을지도 모르는 찌들고 오그라든 오징어로 주전부리를 할 수도 있는, 이중의 장점을 가지고 있는 가게였다.
"어! 이 녀석 들! 어서 학교에 가야지! 학교에 가면 난로가 있잖아. 얼른 가자!"
아버지처럼 인자한 B 선생님을 만나면 우리들은 비릿한 냄새를 풍기는 오징어에 대한 미련을 거두고, 추위도 잊은 채 B 선생님을 쫓아가곤 했다. 이제 막 불을 피운 듯한 석탄 난로는, 벌겋게 달아오르기엔 시간이 요했다. 시끌벅적 교실에 들어서는 아이들의 체온이 오히려 교실을 훈훈하게 했다고 할까.
휴전 후의 풍경이 거의 이런 정도였다. 가정도 학교도 썰렁하기는 동지섣달에 한 정 된 게 아니었다. 집은 폭격으로 불에 타 안과 밖 경계가 없어지고, 집주인이 누구고 피난민이 누군지 굳이 구별하지 않았다. 밥을 먹으면 산 날이고 죽도 없이 맹물을 끓여먹으면 죽은 날처럼 암울했다. 추위와 굶줄임은 그때 이미 익숙했으므로, 오늘날에도 추위가 나에게 두려움을 끼친다.
보일러 온도를 올려놓고 나는 머풀러에 코트로 무장하고 책상에 앉았다. 영하도 아닌데 이게 무슨 한파라고 기상 예보를하는가. 한파라면 우리 초등 시절 거의 영하 19도로 치닿고, 남다리 께 전봇대가 찡하게 우는 소리, 찹쌀떡 장수의 쉰 목소리에 얼음이 섞이는 밤, 남다리 건너기 전 허술한 가게 뒤에 서서 쩍 쩍 갈라진 손등을 쓸어보는, 그 시절을 겪지 않고서는 말도 하지 말아라.
나는 마음을 다져먹고 노트 북을 열었다. 그렇다. 오직 서포 선생이다. 서포 선생이 내 스승이고 거울이고 등대고 목표이다. 무릎 좀 시리다고, 한파를 들먹이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옛날 그때를 꼭 회상하지 않더라도 크고 작은 일, 그 느낌에 요란 떨지 말 일이다. 덤덤하고 담담하라. 대저 하느님께서는 견딜만한 시험만 주신다고 하지 않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