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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마늘잎 장아찌

능엄주 2021. 11. 16. 11:35

어머니의 마늘잎 장아찌

 

신축년 11월 15일 저녁 해가 여수항 쪽으로 사라질 무렵, 벽련항 카페에서 나왔다. 마지막 배를 타고 노도로 돌아오니 택배가 도착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택배는 친구가 보내온 각종 장아찌였다. 벌써부터 보내준다면서 친구는 그동안 살림 정리하느라고 많이 바빴다고 카톡을 했다. 택배 상자를 안고 집으로 걸어오면서 나는 불현듯 어머니를 생각했다.

 

그 옛날 봄눈이 풀풀 날리던 날 나는 C여고를 졸업했다. 나의 큰 오라버니가 나를 데리러 C시에 내려왔다. 어머니와 언니의 합동작전에 군에서 휴가나온 큰 오라버니가 동원된 것이었다. 모녀의 합동작전은 아저씨뻘 졸부에게 7살이 못돼초등학교에 입학했으므로  당시 만 열일곱 살이 채 될까말까한 어린 나를 결혼 시키려는 해괴한 모의謨議였다. 

 

한 주일에 두 번 꼴로 S대 법대생의 만리장성이 나를 뒤숭숭하게 만들던 때, 서울로 시집간 큰언니와 가끔 편지가 오가면서 나는 나의 학교 생활과, S대생의 만리장성에 대해 편지에 쓴 게 화근이었다.  게다가 등록금이 수 개월 미납 돼 그 벌로 교장실 청소를 나혼자 도맡아 하는 사정을 토로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로 펀지가 왔다고 학생생활지도부 교사에게 불려가 야단을 맞을 때마다 교무실에 계신 수 십 명의 선생님들 보기가 나는 민망했고 청소를 하면서 매양 눈물이 났다는 이야기도  편지에 썼다.

 

갑자기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가고 고3이던 나만 덜렁 C시의 친구집에 남아 외롭고 쓸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시기였다. 나는 나중에 알게 된,  같은 학년 민애의 육촌이라는, S대생의 만리장성이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 현실이 괴로운 나에게는 엎친 데 덮친 격이었으니까.  S대면 제일이냐? 나를 언제 봤다고 교무실에 불려가 야단맞게 만들어? 교장실 청소도 속이 터지는데 무슨 연애편지?  

 

나는 장기간 교장실 청소에다, 남자 대학생한테서 연애편지가 학교로 왔다고, 학생생활지도부 담당 교사에게 닦달을 당하고 벌은 벌대로 받았다. 반성문 쓰기는 더 싫었다. 내가 왜 반성문을 써? 나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내가 편지 보내라고 시켰냐고? 내 항의는 교무실이 떠나가도록  큰 소리를 질러대는 생활지도부 교사에게 먹히지 않았다.

 

C 시에서 3번째 가는 갑부집에 시집간 큰 언니가 이런 나의 고민이 적힌 내 편지를 받자마자  '진작 말할 것이지 이 맹꽁아! ' 하면서 졸업전에 밀린 등록금 전액을 보내주었다.  미납 등록금을 해결해 준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그런데 큰 언니는 땔 나무가 없으면 장롱을 뽀개는 융통성없는 어머니를 충동질했다. 경천동지까지는 아니지만 두 모녀가 나에게는 하등 도움이 안되는 결혼 모사를 꾸미고 있었다. 도움은 고사하고 소녀시절 나는 철저하게 독신주의를 지지했다. 남친, 연애는 숫째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

 

졸업식이 끝나고 교정에서 정자 아버지가 우리들의 백로클럽 친구들을 전부 청명원으로 모이라 해  기념사진을 찍어주었다.  그런 후 나는 큰 오라비 손에 붙들려 마치 포로 송환하듯이, 친구들과 변변히 작별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상경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즈음에 마늘잎 장아찌가  우리집 식탁에 왕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김치담그기보다 재료값도 안 들고 그저 칼칼한 보리고추장 한 가지면 마늘잎 장아찌는 간단하게 간이 잘 맞았다. 고추장이 마늘잎 장아찌 맛을 좌우하는 것 같았다. 마늘도 아니고 마늘 쫑도 아닌 마늘잎은 어머니의 고추장 항아리에서 폭 삭아 그 맛이 일품이었다. 마늘잎 장아찌 말고도 어머니의 음식 솜씨는 전부터 으뜸이었고, 마늘잎은 저녁 나절 시장에 나가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큰 언니는 그 미모덕으로 C시에서 3번 째 갑부 집 며느리가 되었으나 어머니는 여전히 방구들을 짊어지고 탄식을 일삼았다. 타고난 좋은 솜씨로 작은 가게라도 꾸려 볼 엄두는 내지 못하고 오직 마늘잎 장아찌만을 연달아 상에 내곤 했다. 그러면서 그 가난이 마치 내 탓이기라도 한 것처럼 결혼 종용을 사그리 뭉개는 나를 악덕 계모처럼 다그치곤 했다. 

 

 마침 인근에 사는 S대 교수 사모님이 나를 보더니 초등생 아들 가정교사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환영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언니가 집에 오는 날은 내 결혼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고, 구박이 더 심해졌다.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나는 한 오리 미련도 없이 가방을 챙겨 그 댁으로 옮겨갔다. 엄연한 가출이었다. 

나는 아예 머나먼 곳으로 떠나 숫제 발을 끊고 절연하고 싶을 만큼 결혼 이야기가 끔찍했다.  언니는 글쓰기를 좋아하는 내 장래를 위해서 특별히 돈이 많은 남자를 선택했다는 변명이었다.  생활이 넉넉해야 감정이 풍부하고 글도 잘 쓸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밀린 등록금을 완납해 준 언니가 고마운 한 편, 속물처럼 보여 한없이 미웠다. 미납등록금은 차라리 내가 졸업한 후에 취직을 해서 갚을 수도 있었지 않은가.

 

 S대 사모님이 만드는 음식은 주로 고기 일색으로 너무나 기름지고 내 입에 맞지 않았다. 차츰 집에 가기는 싫고 어머니의 마늘잎 장아찌는 먹고 싶은 나의 잠재된 이중성이 드러났다. 어머니는 묵장아찌도 잘 만들었고,  바다 향기가 나는 청태장아찌도,  밥 뜸들 때 밥에 얹어 쪄내는 조기찜도 맛이 뛰어났다. 조기찜과 명란찌게는 내가 세상에 나와 먹어본 음식중에 가장 선호하는 반찬이었다. 입맛이 고향을 부르고 어머니를 생각하게 했다.

 

몇 달이나 나를 만나지 못했으니 결혼 이야기가 이제 좀 뜸해졌을까.  아무 불평도 없이 마늘잎 장아찌로 밥을 잘 먹는 가족들도 보고 싶었다.  마늘잎 장아찌가 매일이다시피 올라오던  그 초라한 밥상이 몹시 그리워졌다. 어머니에게  마늘잎 장아찌를 조금 보내달라고 할까. 나는 끝내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어머니를 향한 내 심사는 이미 뒤틀렸는데  입맛은 왜 변하지 않는지 혼란스러웠다. 

 

마지막 배를 타고 노도 섬에 내리자마자 나에게 다가온 친구의 장아찌 택배가 아득히 흘러간 날을 회상하게 했다. 자그마치 매실, 무, 더덕, 오이, 마늘쫑, 우엉, 멸치, 등 7종류였다. 풀어놓고 보니 담은 솜씨나 그 맛에서 어린 시절 내 어머니가 떠올랐다. 부자소리 들으며 잘 살다가 졸지에 파산지경에 내몰린 부모님의 고뇌가 헤아려졌다.

 

친구의 장아찌는 한석봉 어머니의 떡 썰기처럼 크기가 한 결 같고, 모양새가 또한 격있고 완벽했다. 특히 미원 같은 것 일체 넣지 않은, 짜지도 달지도 않으면서 순수하고 담백한 맛이 멋지게 하모니를 이룬 것이 놀라웠다.  TV 에 등장하는 요리연구가들의 그것과는 대별되는, 친구의 장아찌는 나에게 감동이었다. 그 위에 대작大作을 기대한다는  친구의 카톡에 나는 그만 목이 메었다.

 

친구가 보내준 깔끔한 장아찌로 저녁 밥상을 차렸다. 저녁식사는 친구의 정성과 사랑을 먹는 느낌이었고,  또한 가난한 시절에 즐겨먹던 마늘잎 장아찌를 떠올렸다. 또한  딸은 전혀 뜻이 없는 결혼을 종용하던  계모같은 내 어머니를 추억하는 귀한 시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