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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근 조림

능엄주 2021. 9. 25. 12:40

연근 조림

 

편한 대로 몇 가지 장아찌를 구입했다. 꽤 괜찮은 매장에서 사온 것인데  조미료를 듬뿍 넣었는지 물컹대고 들치근한 게 내 입맛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처음 도착하는 그 시각부터 나는 민생고에 맞닥뜨리는 형국이 아닌가. 섬에서 섬으로, 큰 섬은 노량대교로 가게 되어 편리하지만 작은 섬은 배를 타고 들어가야한다. 밥을 해결한다고 다시 배를 타고 나올 수는 없는 게 아니냐. 이미 날도 저물 것이고 나가 본들 근처에 무슨 점포가 있는지 전혀 모르기 때문에 걱정이 앞섰다. 연근 조림은 도시락을 싸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나온 대안이었다.

 

지난 번 조카와 함께 현장답사할 때 그 섬에는 생수와 라면을 파는 가게가 하나 있었다. 우리는 구운몽원, 사씨남정기원을 한바퀴 돌고 내려와서 너무나 목이 말라 산 아래에 위치한 가게에 들렸다. 지하철 역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물품, 음료수 종류는 없고, 오직 생수가 있어 한 병씩 시원하게 마셨다. 그 가게는 찾는 손님이 없으므로 문을 아무 때나 열고 아무 때나 닫는다고 했다. 마을 주민이라고 해야 열 몇 가구가 전부라는, 그래서 낮시간에도 적적하기가 산중 절간 이상이라는, 우리는 그 적요를 즐기며 산을 타고 내려온 것이었을까. 그날 기분은 나쁠 일이 없었다. 경쾌하고 예감이 좋았다고 기억한다.

 

치과 진료를 마치고 돌아오자 이미 저녁시간, 야채 가게들이 문닫을 시간이었다. 나는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재빨리 달려갔다. 묻닫기 일보 전, 조리하는데 손이 많이 가는 연근은 몇 봉지 재고가 있었다. 기왕 힘들게 조림을 할량이면 두 봉지가 적당할까. 나는 망설이지 않고 두 봉지를 사들고 왔다. 흙투성이 연근을 깨끗히 씻는 것만으로도 조림의 과정에서 벌써 반은 진행한 것처럼, 씻는데만 수고와 시간이 제법 소요되었다. 그런 다음 단단한 연근을 칼로 썰었다. 0.5mm 두께로 썬다는 게 치과에 가서 기운을 다 소진하고 온 탓인가, 손이 헛놀아 손이나 베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썰어놓고 보니 양이 많아 괜히 두 봉지를 사왔다고 후회했다. 분량이 많으면 힘들어서 대충, 대강, 이렇게 흘러가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끓는 물에 두어차례 데쳐냈다. 선풍기를 들이대고 물기를 제거한 후 더는 몸을 가동시키지 못할 만큼 지쳐서 일찍 잠을 청했다.

 

무슨 도깨비 출현일까. 나는 연근을 처리하느라고 피곤해서 다른 날보다 일찍, 22시에 잠들고 오늘 새벽 2시에 홀연 잠에서 깨어났다. 한 권은 완전 독파. 정독을 했지만 같은 내용이라도 역자가 다르니 필시 내용도 상이점이 있을 것 같았다. 한 권을 부탁했는데 딸애가 두 권을 사온 것이다. 나는 두 권째 책을 펴놓고 읽었다. '한밤중 내 잠이 깨이는데는 다 그만한 까닭이 있다' 라고 나름 쾌재?를 부르며 역자의 말에 이어 일단락부터 차분히 읽어나갔다. 일 단락 끝 부분에 독자가 지켜야 할, 반드시 지켜야만 성공의 문을 여는 열쇠를 얻을 수 있다는 설명이 있었다.

 

10분에서 30분동안 가부좌. 나는 그 30분을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10분 후 눈을 떴다. 다리를 펴고 허리를 비틀었다. 다시 시도했다. 이번에는 좌정한지 20분 후에 눈을 떴다. 눈도 어깨도 움칠, 움직이면 규칙을 어기는 것이었다. '꼼짝 안하고. 축 늘어지지는 말고' 주의 사항을 유념하고 다시 10분을 채웠다. 오늘을 포함 일주일을 좌정, 몸을 통제하는 법칙을 마스터 한 후에 제 2단락으로 옮겨가는 순서였다. 성공의 문을 여는 열쇠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닌 것이다. 물론 책을 처음부터 한 번 쭉 읽어낸 후에 이 지침을 실행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며칠 후부터는 그만한 시간여유가 내게 없다. 

5시가 되자 창밖이 훤해졌다. 나는 두어 시간 잠을 더 자기 위해 소등한다. 잠을 잘 만큼 자두어야 낮시간이 평화롭다.  7시! 무슨 기척에 나는 소스라쳐 일어났다. 머릿속에 연근조림이 숙제처럼 새겨져 있었던가.

 

8시~ 11시 나는 드디어 대망의? 연근조림 작업을 착수했다. 어찌나 양이 과한지 다시는 이런 류의 미련을 떨지 말아야지, 다짐하면서 조심스럽게 연근조림이 완성되었다. 벅차게 여겼던 것과는 다르게 아보카토 식용유 덕분인지 연근조림 맛은 양호했다. 애들에게도 나누어 줄 수 있는 많은 분량이 흐뭇했다. 마트에 진렬돼 있는 유명인 레벨이 붙은 것보다 훨씬!  깔끔하고 맛이 좋았다. 성공이었다.

 

연근조림을 성공했으니 오후에는 밖에 나가볼까. 어쩌다 걸치고 나갈 외출복 한 벌이 없냐? 본래 옷차림에 무감각, 더구나 2년 여 동안 코로나19로 외출 기회가 사그리 없어져서일까. 사람 사는 일을 어찌 집안에만 국한시킬 수 있을까. 그러나 나는 밖에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본의 아니게 환자가 되어 수 개월 동안 병원 순례를 하느라 현재의 나에게 무슨 일이든 버거워진 소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