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 한 바탕 격전이 끝나고 소강상태를 겨우 유지하게 되었을 때 우리 동네에는 빈 집이 생겨났다. 우리집을 제외하고 골목 안의 모든 집들은 흔적조차 남지 않고 몽땅 잿더미로 변했으니 빈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집 건물은 바로 우리 앞집 이었다.
그 앞집으로 말할 것 같으면 대지가 근 500평에 그냥 집이라고 보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는 대저택에 가까웠다. 집 평수도 아래 윗층을 합치면 200평은 더 되지 않을까 싶었다. 아렛층 대부분은 집 주인인 변호사 사무실로서 당시 그 지방의 유명세를 타고 있는 변호사 몇 사람의 주택과 사무실을 앞지른 감이 없지 않았다. 규모로 보나 품격으로보나 거의 일류였는데 실제로 법정에서조차 그 집 주인의 명성이 높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변호사가 살던 빈 집, 그들은 어디로 피난 갔는지 돌아오지 않았다. 그집의 너른 정원에는 잡초가 무성하여 낮에도 귀신이 횡행할 만큼 괴괴하고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그래서인지 피난민들이나 본래 그 동네 살던 사람들은 변호사 네 집 뜨락이나 건물에 둥지를 틀 엄두를 내지 않고 있었다.
복닥복닥 붐비는 것은 오로지 우리집이었다. 어머니가 인심이 후했던지 뒷곁에 땅을 깊숙히 파고 묻어놓은 양식이 폭격에도 꺼떡없이 남아 있어 우리 식구들과 피나민들이 서로 화평하게 나누어 먹을 처지가 허용되어서인지 모르지만. 우리집 마당은 펌푸질 할 공간도 남지 않았다. 피난민들의 너울같은 장막, 감히 천막이니 텐트니 하는 용어가 무색한, 넝마조각같은 덮개로 겨우 하늘을 거릴 정도가 되었다.
우리집에선 날마다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피난민들과 합세한 어머니의 아이디어에 의한 예의 영업, 부산과 남쪽 지방으로 피난내려갔다 귀환하는 이들을 상대로 한 장사가 재미를 솔솔 보고 있었다. 그래서 먹는 일에서 원주민 피난민 할 것 없이 비교적 자유스러웠다. 그 진두지휘를 교사 경험이 있는 내 어머니가 맡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 빈 집에는 낮에도 귀신이 득실거린다나, 한밤에는 젊은 여자가 청승맞게 운다든지, 어른 키보다 웃자란 잡초위에 송장메뚜기만 뛴다는 그 빈 집에 대해서 사람들은 소문만 무성하게 흘릴 뿐 좀체로 접근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 기억 때문일까. 나는 빈 집이 두렵고 빈 집에 홀로 남는 일에 거부반응을 나타낼 때가 있다. 그것은 어쩌면 고소공포증이나 좁은 곳에 들어가면 겁먹는 따위의 정서처럼 별 게 아닌 것으로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막상 빈 집에 홀로 남아 잠 안오는 밤을 지내게 되었을 때의 심적 압박은 겪어보지 않으면 알지 못한다.
빈 집의 공포가 6.25 당시 우리 앞 집 변호사 네 집에 국한되어 있었다고 한다면, 올 가을은 그 양상에 일대 변화를 보이고 있음이 분명하다. 빈 집을 내가 지키는 것인지, 빈 집이 나를 지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튼 빈 집의 환영(幻影)은 그리 즐거운 쪽이 아니다.
백화점? 근린공원? 친구? 베스트셀러[천개의 찬란한 태양]으로의 몰입? 이것저것 구상해 보지만 최상의 방법은 빈 집에서 내 정체성을 공고히 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기왕 빈 집에 남아 있을 바에는 좀더 현명하자고 다짐한다.
나는 빈 집에서의 긴 시간이 차라리 축복으로 변 할 것을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