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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에서 온 여인

능엄주 2015. 12. 29. 22:53

연세대 S교수의 <원각경> 강의 예고는 오래 전 메일로 전해졌고 최근에도 연속 메일이 날아왔다.

더는 미룰 수도, 몸 아프다는 이유를 댈 수도 없는 것 같아 나는 오랫동안 해외에서 대사로 계시던 K작가님을 모시고 갔다.

공부해서 남 주나 하는 심리가 작용했고 매번 그 정성을 나몰라라 하는 것이 잘하는 일로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파른 산 꼭대기를 올라가는 험난한 길이었으므로 나는 처음 그곳에 모시고 가는 K작가님에게 송구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리 동서양 철학 등 불교공부에 심취한 분이라 하더라도 내심 여간 미안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두어 차례 다녀온 후 하필이면 그 강의가 중단된 것이다. 가는 길의 험난한 것으로 인하여 송구스런 것은 비교도 되지 않았다.

같은 시간대에 이화여대에서도 훌륭한 교수와 학자들이 교대로 10여 년 이상 좋은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그 쪽을 불참하고 오신 K 작가님에게 이건 예의가 아니다 싶었다.

그날은 나혼자서 갔다.

S교수 강의가 도중에 중단할 거면 미리 전화로 알려주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자세히 알자는 의도가 있었다.

그런데 얼굴 아는 그 누구도 안보이고 다만 평소에 볼 수 없던 보살들만 눈에 띠었다.

그날 따라 산 정상의 바람은 몹씨 거칠었고 마음까지 썰렁한 것이, 나는 산나물 점심공양을 대강 든 후에 서둘러 그곳을 나왔다.

그냥 허무했다.일요일 하루를 잘 보낼 수 없다는 것에 대해 못견디는 심정이 돼 있었다.

그래! 길상사나 가자! 마음 가는 곳으로 가는 거야.

나는 4호선 지하철로 갈아타고 한성대 입구역에서 내렸다.

절에 가는 사람들은 복장으로나 분위기로나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24인승 봉고차에 오르자마자 차가 움직였다.

한 발만 늦었어도 나는 길상사 가는 차를 놓치고 1시간 얼마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는데 참 다행이었다.


다음에 또 올 생각으로 내 옆의 여인에게 길상사 가는 찻시간을 물었다. 그녀는 차 운행시간표를 나에게 주었다.

글씨도 예쁘고 사람도 멋져 보였다.
고맙습니다 라고 내가 말을 먼저 했는지, 그녀가 미소로 답했는지 생각이 잘 나지 않지만
 "저는 시드니에서 왔거든요" 하는 그녀의 말은 분명히 입력이 되었다.

길상사 가는 차편과 시간을 적어가지고 온 그 여인에 비해 무작정 달려온 나는 너무도 뚜렸하게 구분이 되었다.
"호주에서 법정스님 책을 죄다 읽었어요. 한국에 오면 한 번 꼭 다녀갈려고 벼르다가 오늘 왔어요."

길상사의 하루 한나절은 행복하였다.

골짜기, 골짜기 스님들 처소와 극락전에 깃든 영적 기운을 느끼며, 우리는 경건한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옮겼다.

생시의 법정스님 모습에 훔뻑 빠져들었다. 맑고 향기로운 시간이었다.


활짝 핀 영춘화와 수선화가 법정스님의 옛 일을 말해주는 듯,

절뜨락에 모신 성모마리아처럼 생긴 관세음보살상이 우리를 반겨주는 듯, 백석시인의 연인이었던 김영한여사--길상사를 법정스님에게 보시한 길상화보살님의 공덕비를 손으로 쓰담으면서 눈물겨운 감동의 순간을 맞기도 하였다.

길상사에서 운영하는 찻집에 들러 대추차로 목을 축이고 떡도 먹으며
시드니에서 온 여인과 오랜 벗처럼 친숙하게 보낸 일.

그리고 다음에 또 절 나들이를 함께 하기로 약속했다.
내 젊은 날  이런 일들은 주변에서 흔히 일어났다. 하지만 세파에 시달려 내 인상이 변질되고 표정 역시 밝을 수가 없을 터인데

이 무슨 엉뚱한 친교이며 도반 역할이람.

생각할수록 기이한 인연, 어쩌면 법정스님께서 맺어주신 선연善緣임이 틀림없다고 여겨진다.

우리는 그녀가 시드니로 돌아가기 전에 도선사에서 다시 만나기로 언약하고 성북동 칼국수를 먹고 헤어졌다.


참 별일도 다 있어! 나는 돌아오는 길에 가만히 미소지었다.

썩 괜찮게 보낸 하루였음을 시인한다. 시드니에서 온 여인때문이었다.


임재문   10-04-21 01:08
시드니에서 온 여인 잘 읽었습니다. 그렇게 인연이 소중하다는 것 저도 길상사 한 번쯤 가서 대추차의 향에 취해보고 싶어지내요 감사합니다.
변영희   10-04-25 07:50
임재문 선생님
봄이 되니 지난 날 박수주 선생님네 가서 우리 동인들이 하루밤 지낸 일 생각나네요. 특히 민들레 잎 따다가 쌈 싸먹은 것. 임재문 선생님의 에피소드도.
길상사 가시는 길 알려드릴게요. 4호선 한성대역 6번 출구로 나와 직진 50M정도.  작은 횡단보도 건너면 거기 길상사 가는 베이지색 봉고차가 있어요. 시간은 일요 10시. 13시 15시.사람들이 많으니 좀 일찍 가셔야. 불교신도 아니라도 누구든 가시기 좋은 곳.선생님도 한 번 가보세요.다른 절처럼 오방색의 단청도 아니고 산책하기 편해요.어떤  새로운 격이 느껴지는 그런 절같아요.선생님 고맙습니다.